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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일 중의 하나는, 흔히 말하는 ‘기브 엔 테이크’라는 개념이다. 주는 만큼 받는다. 또는 받는 만큼 준다. 이것은 20세기, 아니 21세기가 추구하는 ‘합리성’의 한 얼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합리성이라는 것이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20세기나 21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기원전, 아니 선사시대의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결코 이것은 인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적이라는 것과 이성적이라는 것은 사실 잘 따져봐야 할 문제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의 ‘이성적’이라는 개념은 인간적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동물적이다. 그러니까 동물의 세계야말로 ‘기브 엔 테이크’가 통용되는 합리적인 세계라는 것..
예전에,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알았던 여자는 자신의 신체 중 가장 매력적인 부분으로 뒤통수를 꼽았다. 한번 만져보라고 해서, 그때껏 손 한번 제대로 잡지 않았던,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사실 우리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해서 나는 그 당시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또 그녀도 딱히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말로는 남자 자체에 아직 흥미가 없다고 했지만 그건 아직 적당한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그녀에게 적당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셨다. 영화를 같이 보기도 했다. 생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케이크를 사서 카페 같은 곳에서 촛불을 켜고 조용하게 노래를..
나는 사람의 몸이 어디서부터 늙는지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목이었다. 나는 나중에, 겨울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겨울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고, 그녀에게 목도리를 선물했다. 물론 늙는다는 것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어서 비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고, 처음에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인생은 날 때부터 불공평한 것이고, 그녀는 참 미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그녀의 사진들을 보았다. “똑같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특별히 더 예쁘게 나온 그녀의 사진들을 골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원래의 사진들 속에 섞어 넣었..
나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물론 무엇보다 내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 내 자신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이건 아주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모든 행복들을 나는 처음에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이 모든 행복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불행한데 나 혼자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인거다. 이건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이제 그 ‘연결되어 있음’에 집중해보면 전혀 새로운 가능성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얘기가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결론으로 이끌어진다. 이를테면 며칠 전 티브이에서 현대의 도인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는데, 그들은 깊은 산속에 혼자 살고 있다. 17년간 지리산의 어느 토굴 속에 살..
일행이 전부 넷이어서 택시의 뒷자리에 셋이 타야했다. 나는 가장 나중에 탔다.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내게 바싹 붙어 있었고, 무릎 위에 올린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나를 제외한 셋은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가끔씩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그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택시는 목적지를 향해서 계속 달리고 있다. 밤은 깊고, 차내는 어두컴컴했지만, 그녀의 얼굴만은 아주 환하게 보인다. 확실히 그녀는 취해 있었고, 나는 자꾸만 술이 깨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대화에 참여한다. 나는 더 이상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내 ..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는 걸까? 이 질문은 예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에서 제작된 티브이용 만화, “보노보노”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 만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골수 매니아 층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검증된 유명한 만화였다. 이른바, 어른들을 위한 철학적인 동화, “어린왕자”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어린이 만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게시판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나는 이미 똑같은 제목의 글을 썼고,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00년 1월의 일이다. 게시물 번호 46번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위의 질문에 대해, 그리고 만화에서 제시된 그 해답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다시 그 답을 이곳에 적자면 이렇다. - 어째서 즐..
열한 시에 문을 닫는 관계로 열 시 삼십 분경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항상 신경이 쓰인다. 일단은 들어오는 입구에서 자리로 안내하면서 영업시간이 열한 시까지인데 괜찮으시겠냐고 묻는다. 그럼 대개의 손님은 현재 시간을 확인하고 (열 시 삼십 분이다!)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또 대개의 손님은 결코 열한 시 이전에 자리를 일어서는 법이 없다. 나는 이 점이 아주 못마땅하다. 그렇다 해도 손님은 손님이니 무례하게 굴 수가 없다. 마감은 항상 내 몫이기에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늘도 열 시 삼십 분경에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손님을 맞으러 나가는 직원에게 꼭 물리치고 오라고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역시 자리에 앉고 만다. 남녀 한 쌍으로 옷차림이나 외모는 평범하다. 여자는 베이지 색의 바바리를 걸쳤고, 남..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어떤 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사라지므로, 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것들은 그 반대로, 사라짐 그 자체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것들은 사라지기를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서,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안도와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어찌되었든,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 - 모든 영원하지 않은 것, 모든 번잡한 것, 모든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 모조리 사라지고 난 뒤, 마침내 드러나는 것이 세상의 참모습은 아니다. 이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사라짐’이 이미 세상에 속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