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는 걸까? II -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본문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는 걸까?
이 질문은 예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에서 제작된 티브이용 만화, “보노보노”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 만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골수 매니아 층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검증된 유명한 만화였다. 이른바, 어른들을 위한 철학적인 동화, “어린왕자”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어린이 만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게시판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나는 이미 똑같은 제목의 글을 썼고,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00년 1월의 일이다. 게시물 번호 46번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위의 질문에 대해, 그리고 만화에서 제시된 그 해답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다시 그 답을 이곳에 적자면 이렇다.
-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는 걸까?
- 슬프고 괴로운 일이 끝나기 위해, 즐거운 일은 끝나는 것이다.
이 답이 제시하는 결론은 간단하면서 결코 간단하지 않은데, 일단 간단하게 내 식으로 풀어보자면 이렇다.
즐거운 일과 슬프고 괴로운 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것은 똑같은 것의 다른 형태,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순한 자리바꿈에 불과하며, 중요한 건 그 ‘자리’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언제나 그 ‘자리’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는 어떤 일, 슬프고 괴로운 일, 즐거운 일, 또 슬프면서 즐거운 일들로 채워져 있고, 그래서 언제나 가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일들은 언제나 언젠가 끝날 수 있고 끝나지만, 그 ‘자리’만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사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반복되어 나왔던 ‘언제나’라는 부사는, 무시간성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시간이란, 선후관계, 그래서 어떤 일이 빈번하게 다른 일과 함께 또는 이끄는 형태로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 동시관계 - 선후관계를 연관지어 말하는 인과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시간을 절대적인 물리량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논리관계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으로, 전도된 판단을 필요로 한다. 즉, 시간이 선후관계, 인과관계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시간을 이끈다는 판단이다. 여기서 절대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이렇게 절대적 물리량으로서의 시간개념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개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앞서 얘기한 무시간성 속에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자리’(빈위, 술어, 존재)라는 개념이다. 또한 내가 이미 ‘사랑에 대해서’라는 단상에서 주장한 바 있는 ‘과거는 현재의 결과에 불과하고, 현재는 과거의 결과에 불과하다.’라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란 단순한 논리관계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가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논리관계이다. 물론 그 결과(종속)에 있어서는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에 앞서 시간이 절대성을 잃고 논리관계로 전락했다고 해서, 시간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여전히 시간개념은 본질적인 것이고, 중요하다. 시간은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서, 우리는 이를 존재론의 지평으로 다시 올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즉, 시간은 어떤 사건을 가능케 하는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단순히 사건과 사건의 관계로부터 추출되는 논리관계가 아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시간은 논리관계이면서, 논리관계를 가능케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치 내가 두 가지 개념의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시간이라는 단어를 이중적으로, 또는 혼동해서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을 똑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개념을 통해서 내가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실제적으로 우리가 삶을 통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나는 다시 ‘즐거운 일, 슬프고 괴로운 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우리가 흔히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과거의 ‘사건’을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가? 물론 과거란 현재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미 의미 없는 것으로, 때로 현재를 사는 누군가가 과거에 얽매어 있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그 과거란 현재에 부속되어 있는 가공물에 불과하다. (현재나 미래또한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물리량으로서의 시간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그것이 언제 일어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언제나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의 일이며, 또한 언제나 미래의 일일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은 어쩌면 아직 실제로 있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결론은 마치 그것이, 내가 이 글의 초반에 얘기했던 무시간성 속에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자리’라는 개념과 흡사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우리에게 결코 보여 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사고할 수 없다. 그것은 무의미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실제로 있었던 일’은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다. 이것은 의미의 영역에 있지만, 또한 무의미의 영역에도 있다. 시간을 통해 드러나지만, 시간을 넘어선 지점에서 시간을 가능케 하는, 즉 시간을 논리관계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지루하고 어려운 얘기다.
자, 이제 그렇다면, 이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만화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만화의 주인공 ‘보노보노’는 어째서 즐거운 일이 끝나는 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느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즐거운 일이 어째서 끝나는지에 대한 해답, 슬프고 괴로운 일이 끝나기 위해 즐거운 일은 끝난다는 사실은 진실이었지만, 그것은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끝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슬픔에 대해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다. 보노보노는 다음날 아침 고개를 저으며 숲 속을 걷는다. 그때 반대편에서 보노보노의 친구인 ‘너보리’와 ‘포로리’가 보인다. 그들은 보노보노를 향해서 손을 흔들며 보노보노의 이름을 부른다. “보노보노야, 놀자.”
그러자 보노보노는 비로서 환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달려가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쨌든 다시 또 즐거운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