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설 (11)
시간의재
그 남자는 자신이 더 이상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말의 의미는 이전까지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리라. 십 여년 전 결혼했을 때, 그는 자기 인생이 새로 시작되는 기분을 느꼈다. 진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결혼을 통해서 인생 - 특히, 그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기 보다는, 어디선가 그런 생각이 그에게 찾아왔고, 그는 마지못해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게 자기 인생에 무슨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 그것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다른 여러 사건 - 진학이나 입대 같은 일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
어느 날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방 안이 햇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환하고, 너무 밝고, 너무 눈이 부셨다. 잠에서 막 깨어나 사리분별이 원활치 않은 머리로 그는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어제와는 다른 어떤 일이 지금 막 벌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가만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대로의 자세로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 역시 계속 그대로 두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게 어제와 똑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다만 그가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좀 어이가 없었..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행복’이라는 단어였다. 3류 드라마, 또는 재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기자들처럼, 그들은 행복한 커플이라는 지문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다. 만일 그들이 연기자라 한다면, 그들의 연기는 3류가 아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그 눈부신 커플을 보자마자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으니까.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슬픔이 나에게 어떤 힘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나는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절망감이라 불러야 할까? 그렇다면 절망감은 무기력과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다준 슬픔은 고통이었고, 그것은 마비상태에 빠져 있던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학생회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9층까지 있었는데도 왜 엘리베이터가 없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단순히 아주 예전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대부분 건물은 이미 다른 최신식 건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건물은 아직 남아있다. 7층에 총학생회 사무실이 있었다. 9층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7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남들에 비해 불평이 적었다. 그는 타고난 강골이었다. 비록 몸집은 자그마하고 마른 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힘도 셌고, 체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1991년의 봄은 견디기 어려웠다. 무슨 일인가로 지하창고를 쓸 수 없어서, 시위용품들을 7층 복도에 두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결혼한 이유가,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와 결혼한 이유가 엄마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이 그는 결혼상대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그녀가 아예 결혼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어쩌면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도 그녀의 결혼보다 상대가 그라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전까지 전혀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 주위에는 남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미녀였고, 언제나 미소 짓는 얼굴에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명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만에 때려치우고, 곧바로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회계사 시험을 준비해서 전공자보다도 더 짧은 시간..
그가 거의 매일 아침 운동하러 들르는 스포츠센터 옆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어느 맑은 여름 아침이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고, 그렇게 서른다섯 번의 여름을 겪은 후였다. 또 여름 아침이라면 그보다 더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새삼 다시 여름이고, 그 아침이 너무나 맑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히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여고생들의 맨다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가끔 떠들듯이, 요즘에는 여고생들의 치마가, 그가 더 젊었던 시절,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간혹 가다 보았던 눈이 휘둥그레 질만큼 야한 여자들의 치마만큼 짧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평범해 보이는 여고생들의 치마도 그만큼 짧았다. 물론 그런 풍경도 거의 일상적이었지만, 눈 부신 햇살과 더불어, 새삼스레 그의 가슴을 콩닥거리..
그는 몇 년째 돈을 벌지 못했다. 생활은 부모님이 매달 부쳐주는 돈으로 꾸려갔다. 동생도, 가끔 건너 뛰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탰다. 그는 처음 얼마간, 한 반 년 정도는 그런 생활에 굴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굴욕감도 자신이 극복해야 할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여기기로 했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장사나 사업을 하기에는 주변머리가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두 번의 사업 실패 이후에 깨달았다. 그는 웬만하면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했다. 동료나 거래처나 직원이나 심지어 손님이나, 누구도 만나지 않는 그런 사업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가 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뭔가 일을 해야 했지만, 그는..
“봤어?” “뭘?” “고양이.” 그녀가 말했다. “어디서?” “지금 막 우리 앞을 지나갔잖아.” “우리 앞?” “그래. 우리 앞을 막 지나서 저기, 저 골목 쪽으로 들어갔어.” “골목이라고?” 그녀는 보도 오른편에 보이는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은 마치 그녀가 가리킨 그 순간, 생겨난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탓일 것이다. 나는 새삼 우리가 걷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장소였다. 우리는 영업이 끝난 은행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기다 주차시켜면 되겠네 하고 말했다. ATM기계가 놓인 무인점포는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 나는 마치 그것이 꿈속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내내 아무도 보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