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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완벽한 대상 본문

소설

완벽한 대상

물고기군 2013. 4. 22. 23:42

그가 거의 매일 아침 운동하러 들르는 스포츠센터 옆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어느 맑은 여름 아침이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고, 그렇게 서른다섯 번의 여름을 겪은 후였다. 또 여름 아침이라면 그보다 더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새삼 다시 여름이고, 그 아침이 너무나 맑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히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여고생들의 맨다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가끔 떠들듯이, 요즘에는 여고생들의 치마가, 그가 더 젊었던 시절,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간혹 가다 보았던 눈이 휘둥그레 질만큼 야한 여자들의 치마만큼 짧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평범해 보이는 여고생들의 치마도 그만큼 짧았다. 물론 그런 풍경도 거의 일상적이었지만, 눈 부신 햇살과 더불어, 새삼스레 그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다. 아니, 마치 그의 가슴을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슬픔 속에, 얼마 전에 헤어진 P의 존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P와 헤어진 일이 그의 삶에 무슨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그 당시, 그 일은 당연하리만큼 자연스러워서, 아무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슬픔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헤어졌다는 표현도 적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느꼈다. 솔직하게 말해서 P는 요즘 흔히 말하는 ‘섹스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다. P와는 꽤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다. 그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부터니까, 거진 십 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아,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 그동안 그는 그대로, 아마 그녀도 그녀대로 자기 내키는 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 왔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섹스를 잘하고 좋아하는 여자가, 자기 하나로 만족할 리가 없다고 그는 내내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상당히 부정기적이어서, 짧게는 두어 달, 길게는 거진 일 년간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고 지낸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일 년이라 해도 일단 만나기만 하면 마치 어제 헤어졌다 만난 것처럼 친숙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몸을 섞은 것치고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그게 이상하지도 않았다. 꼭 대화를 많이 나누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친밀감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아직 교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다음번에는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재밌겠는 걸, 어쩜 그런 생각도 다 했어? 교복 이후에는 뭐였더라? 두 사람은 동대문에 나가서 각종 유니폼, 무용복, 또 별스런 여러 의상을 구입했다. 그녀는 그다지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몸매 하나만은 정말 끝내줬다. 그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상체를 일으켜 앉아 있는 그녀의 옆 모습을 마치 꿈속의 장면처럼 바라보던 걸 기억했다. 목과 어깨, 가슴, 그리고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정말 사진 속의 모델 같았다. 이상한 점은 그렇게 몸도 마음도 잘 맞고, 성격도 적어도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단 한 번의 의견 차이나 다툼도 없었던 그녀를 왜 자신이 정식으로 사귀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오빠는 결혼 안 해? 언젠가 P는 이렇게 물었다. 결혼?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고 막 박사 학위를 딴 후였다. 그의 인생은 잘 나간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평탄한 편이었고 지금껏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건 그의 성격이나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그에게 있어 유별난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P였다. P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일탈이었고 모험이었다. 그가 사귀었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고, 이제 결혼을 앞둔 그의 약혼녀도 그랬다. 약혼녀는 같은 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알게 된, 그보다 네 살이 어린 여자 강사였다. 사귀고 나서야 그녀가 대단한 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몇 번이나 말했듯이, 그는 처음부터 그 점 때문에 그녀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 데에는 그 점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에 있는 대학 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요즘에는 외국에서 학위를 따오지 않는 한, 교수직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삶이 지금까지처럼 아무 어려움이 없길 바랐다. 물론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집 안이 그렇게 부자인 것치고는 전혀 되바라진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여서 자기 주장이 거의 없는 순종적인 여자였다. 그를 네 살 많은 남자가 아니라, 거의 마흔 살 많은 남자처럼 대했다. 한 번도 말다툼이 없었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P와 같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P와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잘 안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그녀가 P와 전혀 다른 여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느낌은 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나?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P를 만났고, 또 P는 나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줬던 걸까? P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때는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는 것조차 의문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이제 두 사람이 그만 만나야 할 것 같다고 합의했을 때, 그 마지막 날에도 아무 의문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계절이 바뀌는 거와 같았다. 날씨가 추워져서 아, 이제 겨울이구나 싶다 해서, 여름이 지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것과 같았다. 다시 계절이 돌면 여름이 올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야 그는 그녀가 계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느꼈다. 혹시 내가 무슨 정신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그런 존재를 상상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기분이 들 때면 그녀의 흔적을 찾아 자기 방을 뒤지고는 했다. 이제 얼마 후면 결혼과 함께 떠나야 할 방. 교복이나 다른 별난 의상들은 찾지 못했지만, 마치 마를린 먼로의 그것처럼 순백의 미니 원피스를 찾아냈다. 그녀가 이 의상을 입고 마를린 먼로의 흉내를 내던 걸 기억했다. 그녀가 치마를 장난스레 펄럭이던 걸. 그리고 그녀의 쭉 뻗은 다리. 그 탐스럽고, 매끈하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그 완벽한 아름다움의 한 조각. 그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 가슴이 옥죄어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여름 아침의 향기를 느꼈고,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인생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를 뒤흔든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틀렸어. 그의 후회는 그런 깨달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밤마다 눈앞에서, 그것, 순백의 미니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완벽한 다리를 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천장을 뚫고 내려와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일어서면, 정말 원하기만 하면 저것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니, 저러한 것이 정말 우리 인생에 존재할 수 있을까? 저렇게 완벽히, 마치 인생 전체를 버리고서라도 가지고 싶은 대상이? 하지만 그것은 그냥 그곳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고, 그도 영원히 몸을 일으킬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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