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정전 본문
소년(일반적으로 고등학생 나이를 소년이라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정신연령으로 따지면 더 쳐준 셈일 것이다.)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다.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소년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것처럼 그 사랑은 실패했다.
소년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인근 여고의 여학생이었다. 소년은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뻤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예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소년은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 것이다.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이 판단하기에 자신이 넘볼 만큼 예뻤다. 이것이 소년이 아는 것이었다. 저 정도 여자라면 나랑 사귀어줄지 몰라.
소년이 아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장수를 베려면 먼저 그 말을 공략하라. 그녀는 소년이 속한 서클과 교류하는 여고 서클의 부회장이었고, 당연히 서클에는 부회장 말고도 회장이 있었다. 소년은 그 회장 여자애에게 먼저 접근했다. 그리고 그러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예쁜데다 어쩐지 새침하게 구는, 무엇보다 특별한 감정을 품은 여자에 비하면 어떤 여자라도 쉬웠겠지만, 회장 여자애는 특별히 더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일단 그녀는 예쁘지 않았다. 교정기를 끼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했다. 뚱뚱하다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체격이 건장한 편이었다. 여성적인 매력이 거의 없었다. 몸집이 조그마하고 얼굴이 하얗고 깨끗했던 부회장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단 한 가지 여성적 매력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목소리였다. 그녀와 통화를 하게 되었을 때 소년은 확실히 그것을 느꼈다. 이 애는 목소리가 정말 예쁘구나. 그 목소리 때문인지 소년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남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배려가 있었고 재치도 있었다. 전화에서라면 그녀만큼 매력적인 여자는 없을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래도 소년은 자신의 최종 목표를 잊지는 않았다. 아무리 말이 잘 통한다 해도 그녀는 말 그대로 ‘말(馬)’에 불과했다. 그녀와 그렇게 쉽게, 거의 어린 시절 친구처럼 친해졌으니 이제 부회장 여자애와 친해지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조금 미묘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서클에서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이 슬금슬금 돌았다. 전화로 그녀가 말했다. ‘너와 내가 사귄대.’ 그리고는 그 예쁜 목소리로 맑고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소년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그녀는 그런 소문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소년은 오히려 부회장 여자애의 질투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무되기도 했다. 문제는 도저히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서클에서 회장 부회장이었을 뿐 사적으로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번호를 알고 있으니 전화를 하면 그만이었지만,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누르게 되는 번호는 회장 여자애의 것이었다. 결국 소년이 택한 방법은 가장 소년다운 것이었다. 아니, 거의 유아다운 짓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년은 어느 저녁 할 말이 있다면서 거리에 있는 카페로 회장 여자애를 불러냈다. 그곳은 간단하지만 식사도 가능하고 후식으로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카페였다. 아주 고급스러운 데는 아니었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상당히 격식을 차린 만남의 장소였다. 그날 그녀는 평소와 달리, 아마도 그 카페가 어떤 데인지 알고 있어서 그랬을 수 있지만, 꽤 멋을 낸 차림새였다. 립글로우즈인지 입술에도 뭔가를 발랐고, 머리도 공들여 세팅한 티가 났다. 그리고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고, 어쩌면 그것은 그녀에게도 느껴졌으리라. 그녀는 소년이 자신만큼 긴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런 소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네가 이제 뭘 하려 하든지 그 일은 아주 잘 될 거고, 나는 그런 너를 언제나 응원할게. 그녀는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소년은 금세 마음이 편해지고, 다시금 즐겁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자신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셨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어색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소년은 정말로 그녀와 함께라면, 아니 그녀가 도와준다면 무슨 일이든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느꼈다.
마침내 소년은 용기를 내서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회장 여자애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도저히 그녀 얼굴을 마주 보고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편지봉투에 싸인 편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을 소년은 보지 못했다. 아니 보았다 해도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순간이라고 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녀는 언젠가 둘이 사귄다는 소문을 전했을 때처럼 맑고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소년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이 정도 부탁은 당연히 내가 들어줄 수 있으며 아마 편지를 받는 그녀도 아주 기뻐할 거라는 듯한 웃음이었다. 소년도 그녀를 따라 웃어버렸다.
하지만 두 사람이 카페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미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생각에는 이제 우리 둘은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예전처럼 나에게 연락을 할까? 내가 그녀에게 계속 연락을 해도 될까? 그런데 왜? 만일 부회장과 잘 된다면 그녀와 계속 연락할 이유가…… 그가 연락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는 걸까?
그때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팟하는 아주 작은 기계장치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정전이었다.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녀는 소년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정전은 두 사람이 걷던 작은 구역에서만 발생한 것이었다. 도시 전체가 암흑천지가 된 것도 아니었고, 도로 위 자동차 불빛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밝혀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변을 촘촘히 메운 상점마다 촛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옷가게, 전자제품 대리점, 카페, 가구점. 통유리 너머로 촛불들이 마치 크리스마스 꼬마전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소년은 그 순간 그곳이 동화 속 마을인 것처럼 느껴졌다. 동화책 삽화에 나오는 몇 백 년 전 유럽의 거리,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으로 점프한 것 같았다. 소년은 자기 팔을 붙들고 있는 그녀를 느꼈고, 갑자기 마음속 깊이 행복감이 차올랐다. 소년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지금 옆에 있는 여자가 자신이 오랫동안 동경했던 부회장 그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이 거리를 걷는다면…… 저 촛불들이 마치 우리 만남을 축복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그녀가 아니라 교정기를 끼고 여드름투성이인 다른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행복감은 전혀 줄지 않았고, 아마도 그건 자기 마음이 간절히 그녀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렇게 마음속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진다는 게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소년은 자기 팔을 꼭 불든 그녀의 손을 느끼며 계속 거리를 걸었다. 가슴이 계속 콩닥콩닥 뛰었다.
7년 후 소년은 자신의 예상이 정확히 맞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로 소년은 그날 밤이 영원히 자기 머릿속에 박혔음을 깨달았다. 소년은(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지만, 편의상 계속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어느 날 밤, 거리를 걷다 다시 정전을 겪게 된다. 바로 그 이전에 소년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미인이었다. 키가 컸고, 옷차림이나 걸음걸이도 마치 모델처럼 세련됐다. 소년은 순간 저런 여자와 걷는다면 모두가 자신을 부러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 같은 남자를 만나줄 리가 없지. 이런저런 공상에 소년은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정전이 되었다. 그날처럼 여기저기서 작은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그녀도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소년도 놀랐지만, 그 놀람만큼 빠르게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 또 정전인가? 소년은 첫사랑 여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라면 씁쓸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소년은 그 시절 자신이 너무나 어렸고 바보 멍청이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여자에게……. 소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전인 거리를 계속 걸어갔다. 그날처럼 상점의 유리문 너머로 촛불이 은은하게 밝혀져도 소년은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우뚝 멈춰 섰는데, 갑자기 그 정전의 밤에 함께 있던 여자애가 첫사랑 여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맞아. 회장 여자애였지. 목소리가 정말 예뻤던.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떻게 된 건가? 하지만 목소리는 현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보았던 모델 같은 여자였다. 그녀가 다시 소년의 이름을 대며 맞지 않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소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다가, ‘우리 둘이 사귄대.’라고 말하고는 웃을 때처럼 예의 그 예쁜 목소리로 낭랑하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맞구나.” 그녀가 말했다. 소년도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반가움에 소년의 팔을 붙들었고, 소년은 그런 그녀의 손을 내려다봤다. 가슴 깊이 행복감이 차올랐다. 소년은 그때 깨달았다. 소년은 정전인 거리를 둘러보고 다시금 촛불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소년은 고개를 쳐들고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지상의 정전으로 그 별들은 더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거기에 있었던 거지. 소년은 다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네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 같지 않니. 또 정전이라니.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다시 만나다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