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우체국 털이 본문
우리는 돈이 필요했다. 멀지 않은 도로에서 빗속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타이어 소리가 머릿속을 울려대는 잡음처럼 들려왔다. 담배를 비벼끄고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아래엔 빨간 바탕에 하얀 꽃무늬가 있는 플로어 스커트. 결코 고상한 색조합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뭐든 해야겠어.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단 말이야.”
“뭘, 어떻게 할 건데.”
“은행을 털자.”
그녀는 나의 제안을 묵살했다. 나도 사실 그냥 해 본 소리에 불과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은행보다, 우체국을 털자.”
그녀는 계속 말했다.
“첫째 은행보다는 안전해, 게다가 돈도 있을 거야. 왜냐면 우체국에서도 은행업무 비슷한 것을 보기 때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우리가 우체국을 털리란 것을 생각하지 못할 거란 말이야.”
듣고 보니 나름대로 일리 있는 얘기다. 어쨌든 우린 만족할 만큼의 돈을 얻기만 하면 된다. 우체국이든 은행이든 빵가게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녀와 나는 벌써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방에 불을 켜고,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우체국이 문을 닫을 즈음에 그녀와 내가 우체국 안에 들어간다. 그녀와 나는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셔터를 내린 다음 그녀가 총을 들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내가 돈을 챙긴다. 돈은 우편배달가방에 쓸어 담은 다음 옆문으로 나온다. 유유히 거리를 걸어서 방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우체국이 문을 닫을 시각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란색 스웨터 위에 점퍼를 걸쳐입고 선글라스를 꼈다. 비 오는 저녁에 선글라스라.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우체국에 도착하기까지 빗방울은 멀리서 달려와 곁을 스쳐가는 자동차 타이어 소리처럼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했다. 경찰서 앞을 지날 때는 긴장이 되었다. 리볼버가 들어 있는 그녀의 점퍼 주머니가 너무 불룩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내일 소풍을 떠나는데 이 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정도의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체국이 보이는 골목에서 우리는 담배를 나눠 피웠다. 비 때문에 눅눅해진 담배를 쥔 손끝이 추위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들어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산을 접으며 우체국 안으로 들어서자 내 머리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편지를 마지막으로 부친 때가 언제였지? 누구에게 보냈던 걸까?
그녀가 나에게 눈짓을 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내가 편지를 보낸 여자에게선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스키마스크를 뒤집어썼고, 나도 곧 따라 썼다.
그녀가 총을 꺼내 들고 마치 등대처럼 우체국 안을 휘돌았다. 손님은 우리 둘뿐이다. 아무도 비가 오는 날엔 편지를 부치지 않는 모양이다.
접수대 뒤편으로 여직원이 둘 있었고, 더 안쪽으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자 하나가 뭔가 샐러리맨적인 고민에 싸인 듯 머리를 감싸 안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접수대의 두 여자는 손을 들고, 그녀의 손에 들린 리볼버를 비현실적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손은 들고 있다.
우체국 안의 책임자인듯한 남자도 여전히 고민에 싸인 표정을 지은 채 일어섰다. 나는 은행에 흔히 있는 비상벨 같은 것을 그들이 누르지 않을까 봐 신경을 썼지만 어쩐지 우체국 안에는 비상벨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우체국이 털렸다는 신문기사 같은 건 읽어본 적이 없다.
“정면의 셔터를 내려.”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는 것처럼 턱턱하게 들렸다. 스키 마스크 때문이다.
몇 초간 아무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스키 마스크 밑으로 얼굴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고민을 끝내고 문쪽으로 걸어가 무슨 단추인가를 눌렀다. 그러자 셔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또 얼마간의 참을 수 없는 정적이 우체국 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 내가 행동할 차례다.
남자를 끌고 접수대를 건너가 금고를 안내하라고 했다. 그동안 그녀는 접수대의 두 여자를 구석에 몰아넣고 등을 맞대어 앉힌 채 언제 챙겼는지 알 수 없는 전선을 정리할 때 쓰는 끈으로 그녀들의 양 손목을 묶고 있었다. 치밀한 여자다.
남자는 구석에 생각보다 조그마한 금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너무 조그마했지만 단지 우체국에 금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열어.”
남자는 쪼그려 앉아 손쉽게 금고의 문을 열었다. 손쉽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영화에서는 열지 않겠다고 반항도 하고, 열쇠가 없다든지 비밀번호를 모른다든지 잡아떼기도 하다가, 어렵게 금고의 문을 열어주는 데 말이다. 남자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금고 안을 들여다보자 의문은 쉽게 풀렸다. 금고 안엔 돈 대신 우편물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뭐야, 이건?”
“우편물입니다. 반송된 우편물은 여기에 이렇게 넣어둡니다.”
“어째서 금고 안에 넣어두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관례라서.”
“돈은 없나?”
남자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그녀가 곁에 다가와 내게 말했다.
“그거라도 챙겨.”
어쩔 수 없다. 우편배달가방에 나는 금고 안의 반송된 우편물을 한통도 빠트리지 않고 집어넣었다. 그녀는 남자까지 익숙한 솜씨로 묶고서는 나가자고 했다. 나는 묶인 사람들이 혹시 화장실이라고 가고 싶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위안했다. 옆문으로 빠져나오면서 스키 마스크를 벗었다. 그녀는 다시 선글라스를 꼈고, 이번에는 나도 선글라스를 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거리를 걸었다. 어둑어둑해진 거리의 공기가 시원했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그녀와 나는 별말이 없었다. 우체국에서 훔쳐온 편지들만이 바닥에 흐트러진 채 새 주인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하지?”
그녀는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훔쳐온 편지를 읽는 거야.”
그녀도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맥주나 사 가지고 올까?”
우린 맥주를 마시며 밤을 새워 편지들을 읽었다. 맥주를 마시며 남의 편지를 읽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빵가게습격’ 오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