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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나는 한국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한 개 시장, 즉 우리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과, 세계적으로 - 적어도 두 개 이상 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 중에, 어느 게 더 좋은 소설일 확률이 높느냐 하면, 아무래도 후자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장이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어떤 세계적인 작가의 소설보다 더 훌륭한 한국소설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또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 과연 내가 얼만큼이나 시간을 쓸 수 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정말 좋은 소설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것들 전부를 내가 읽을 수도 없는데, 이를테면 내가 정말로 좋아..
어젯밤 문득 생각난 건데, 어렸을 적 나는 꽤 눈치를 보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 비해 더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죠.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에는 그런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에 ‘비해’ 어쩐다 저쩐다 이런 생각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는 온통 나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으니까요. 이 말은 거꾸로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으려니, 나와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려니 여긴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그중에서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아버지의 혀를 차는 소립니다. 정확히 말의 표현대로 ‘혀를 차는’ 소립니다. 쯧쯧 하는 거죠. (웃기게도 이 버릇은 나한테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혀를 찰 때마다, 깜짝 놀라고 또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
지금까지 몇몇 사회분석가와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우리 시대에 폭발적으로 치솟은 경제 생산성으로 인해 우리는 80대 20 법칙의 극단적 실례와 마주하게 된다 - 다가오는 세계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이, 필요로 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갈 것이며 따라서 80%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그리하여 잠재적 실업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논리가 극단에 이르면 그것을 자기부정으로 이끄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즉 80%의 사람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게 만드는 체제는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 - 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중에서
깨고 나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길 바라지만 난 여깄고 좋지도 싫지도 않아 난 여깄어 여깄어
생각해보면 나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여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최근에 그녀의 영화 세 편(‘언더 더 스킨’, ‘루시’, ‘her’)을 우연찮게(?) 연달아 보고 나서 뭔가 써볼까 싶어, 그녀에 대해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떠올려보니, 할 만한 얘기가 꽤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다. 유명한 여배우니까. 하지만 어떤 여배우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해서, 그 영화에 대해 모두 꽤 많은 할 얘기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따져보니 나는 그렇다. 그런 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적어도 나한테는 꽤 의미있는 여배우인 것 같다. 내가 제일 처음 본 그녀의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제 얘기 할 세 편의 영화 ..
그 남자는 자신이 더 이상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말의 의미는 이전까지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리라. 십 여년 전 결혼했을 때, 그는 자기 인생이 새로 시작되는 기분을 느꼈다. 진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결혼을 통해서 인생 - 특히, 그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기 보다는, 어디선가 그런 생각이 그에게 찾아왔고, 그는 마지못해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게 자기 인생에 무슨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 그것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다른 여러 사건 - 진학이나 입대 같은 일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
어느 날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방 안이 햇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환하고, 너무 밝고, 너무 눈이 부셨다. 잠에서 막 깨어나 사리분별이 원활치 않은 머리로 그는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어제와는 다른 어떤 일이 지금 막 벌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가만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대로의 자세로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 역시 계속 그대로 두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게 어제와 똑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다만 그가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좀 어이가 없었..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행복’이라는 단어였다. 3류 드라마, 또는 재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기자들처럼, 그들은 행복한 커플이라는 지문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다. 만일 그들이 연기자라 한다면, 그들의 연기는 3류가 아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그 눈부신 커플을 보자마자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으니까.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슬픔이 나에게 어떤 힘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나는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절망감이라 불러야 할까? 그렇다면 절망감은 무기력과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다준 슬픔은 고통이었고, 그것은 마비상태에 빠져 있던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