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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학생회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9층까지 있었는데도 왜 엘리베이터가 없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단순히 아주 예전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대부분 건물은 이미 다른 최신식 건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건물은 아직 남아있다. 7층에 총학생회 사무실이 있었다. 9층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7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남들에 비해 불평이 적었다. 그는 타고난 강골이었다. 비록 몸집은 자그마하고 마른 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힘도 셌고, 체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1991년의 봄은 견디기 어려웠다. 무슨 일인가로 지하창고를 쓸 수 없어서, 시위용품들을 7층 복도에 두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결혼한 이유가,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와 결혼한 이유가 엄마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듯이 그는 결혼상대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그녀가 아예 결혼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어쩌면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도 그녀의 결혼보다 상대가 그라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전까지 전혀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 주위에는 남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미녀였고, 언제나 미소 짓는 얼굴에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명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만에 때려치우고, 곧바로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회계사 시험을 준비해서 전공자보다도 더 짧은 시간..
그가 거의 매일 아침 운동하러 들르는 스포츠센터 옆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어느 맑은 여름 아침이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고, 그렇게 서른다섯 번의 여름을 겪은 후였다. 또 여름 아침이라면 그보다 더 많이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새삼 다시 여름이고, 그 아침이 너무나 맑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히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여고생들의 맨다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가끔 떠들듯이, 요즘에는 여고생들의 치마가, 그가 더 젊었던 시절,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간혹 가다 보았던 눈이 휘둥그레 질만큼 야한 여자들의 치마만큼 짧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평범해 보이는 여고생들의 치마도 그만큼 짧았다. 물론 그런 풍경도 거의 일상적이었지만, 눈 부신 햇살과 더불어, 새삼스레 그의 가슴을 콩닥거리..
그는 몇 년째 돈을 벌지 못했다. 생활은 부모님이 매달 부쳐주는 돈으로 꾸려갔다. 동생도, 가끔 건너 뛰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탰다. 그는 처음 얼마간, 한 반 년 정도는 그런 생활에 굴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굴욕감도 자신이 극복해야 할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여기기로 했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장사나 사업을 하기에는 주변머리가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두 번의 사업 실패 이후에 깨달았다. 그는 웬만하면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했다. 동료나 거래처나 직원이나 심지어 손님이나, 누구도 만나지 않는 그런 사업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가 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뭔가 일을 해야 했지만, 그는..
누군가 박근혜가 되어서 지난 유신시절처럼 되면 어떡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건 마치 문재인이 되어서 빨갱이 세상이 되면 어떡하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럴 거라고, 내 생각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물론 백 퍼센트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문재인이 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까?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을만큼 무언가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마음 깊은 곳의 얘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나 자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낙관적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봤어?” “뭘?” “고양이.” 그녀가 말했다. “어디서?” “지금 막 우리 앞을 지나갔잖아.” “우리 앞?” “그래. 우리 앞을 막 지나서 저기, 저 골목 쪽으로 들어갔어.” “골목이라고?” 그녀는 보도 오른편에 보이는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은 마치 그녀가 가리킨 그 순간, 생겨난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탓일 것이다. 나는 새삼 우리가 걷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장소였다. 우리는 영업이 끝난 은행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기다 주차시켜면 되겠네 하고 말했다. ATM기계가 놓인 무인점포는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 나는 마치 그것이 꿈속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내내 아무도 보지 못..
소년(일반적으로 고등학생 나이를 소년이라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정신연령으로 따지면 더 쳐준 셈일 것이다.)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다.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소년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것처럼 그 사랑은 실패했다.소년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인근 여고의 여학생이었다. 소년은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뻤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예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소년은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 것이다.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이 판단하기에 자신이 넘볼 만큼 예뻤다. 이것이 소년이 아는 것이었다. 저 정도 여자라면 나랑 사귀어줄지 몰라.소년이 아는 것이 또 하..
배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실수로 강물 속에 칼을 빠트렸다. 그러자 그는 즉시 뱃전에 무언가 표시를 한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 거냐고 묻자, 그 사람은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내 칼을 빠트린 자리에 표시를 하는 거요,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게, 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다. 그날, 아, 너무나 눈부셨던 날, 그녀는 내게 이 고사를 얘기해줬다. 각주구검. 칼을 찾기 위해 배에 표시를 하다. 그날 우리는 어느 유원지에서 2인용의 조그만 배를 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노를 젓는 동안 내 맞은 편에 앉아, 배 밖으로 팔을 내밀어 마치 우리가 지나온 길을 표시하듯 강물 속에 손가락을 담그고 있었다. 배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