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본문

단상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물고기군 2012. 12. 21. 00:04

누군가 박근혜가 되어서 지난 유신시절처럼 되면 어떡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건 마치 문재인이 되어서 빨갱이 세상이 되면 어떡하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럴 거라고, 내 생각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물론 백 퍼센트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문재인이 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까?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을만큼 무언가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마음 깊은 곳의 얘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나 자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낙관적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마찬가지라는 냉소주의라기보다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김대중 때 비정규직법이 통과되었고, 노무현 때는 한미 FTA가 체결되었다. 이런 일들이 나쁘다는게 아니다. 어쩌면 단지 누구도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재인이나 민주당은, 또는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좌파라기보다는, 중도우파, 그냥 리버럴에 가깝다. 그들이 정권을 잡는다한들, 바꿀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혹 그러려고 한다한들, 적어도 이 사회, 이 세계, 좁게는 대한민국에서, 또 넓게는 민주주의라는 체계 하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이것을 똑같이 대입하면 저들이 정권을 잡는다해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세계는 얼마나 끔찍할까? 글쎄, 어쩌면 그냥 보기 싫은 일들이나, 불쾌한 일들, 때로 분통 터지는 일들이 좀 더 많아질 뿐, 그냥저냥 또 사회는 돌아가고, 삶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런 나의 생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이런 나의 생각이 이미, 저들의 승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거의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이지만,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한 번도 승리해보지 못한 게 아닐까? 앞서 말한대로 실제로 좌파, 진보진영이 정권을 잡았을 때 거의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진정한’ 변화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란 건 그렇게 더 똑똑해진다해서 벗어던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정의상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선택이자, 강요된 선택이지만, 그렇다고 선택이 아닌 건 아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문재인을 찍었지만, 결국 박근혜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상한 말이지만, 문재인을 선택했을 때, 우리는 이미 박근혜를 받아들인다는 선택도 한 셈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불공평해보이는가? 아니면 비합리적이라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표면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은 곳에, 아마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박근혜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데, 그저 조금 더 나아지길 바란다는 데 있다. 아무도 죽지 않길 바라는 데에 있다.

졌다. 패배했다. 이런 말들에 대해, 나는 이전 글에서, 민주주의에서는 어울리지 않다고 말했다. 진짜 패배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때는, 민주주의 자체가 패배했을 때만, 즉, 우리가 민주주의를 버릴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나도 이제마음 깊이 패배감을 느낀다. 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마 그들은, 그리고 나 자신도 그렇게 말함으로써, 이 일을, 저들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선택이기도 한, 이 결과를, 한낱 게임의 일부처럼 여기고자 하는 게 아닐까? 졌다는 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또 어쩌면 다음 번에는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포함되어 있다. 또 어쩌면 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또 말한 건데, 진짜 무서운 것은 바로 그런 생각에 있다.

아니, 다르게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질 수 있다. 패배할 수 있고, 또 깨끗하게 그 패배에 승복할 수도 있다. 다음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지지 않았고, 패배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들은 죽었다.

민주주의의 무서운 점은, 마치 우리 모두가 그 한 순간에, 표를 행사하는 그 투표의 순간에 일순간 평등해진다는 데에 있다. 모두가 한 표를 가지고 있다. 이게 왜 무서운가?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그 반대의 의미, 그러니까 무서울 것 없고, 가장 용감해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이 아닌가? 가장 기적같은 순간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이 정말 무섭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누구도 어떤 죽음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모두가 커다란 악을, 공평하게 나눠가지는 것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똑같은 분량의 악을 나눠가졌음으로, 모두가 악을 행함에 평등해지고, 그럼으로써 누구도 선하지 않고, 누구도 벌 받지 않는다. 다만 죄만이 남을 뿐이다. 

마치 우리는 누구를 죽이기 위해 투표를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반대의 의미가 된다. 누구를 살리기 위해 투표를 하는 것이다. 누구를? 바로 우리 자신을? 아니, 그냥 살아있는 사람을 계속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또 어쩌면 죽은 사람을 계속 죽어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사는, 그런 선택에, 투표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그런 선택이 있다면, 우리는 투표를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세계를 상상해 냈다면, 이미 우린 그런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투표는 그렇게 죄를 나누는 데에 있다.

나는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쌍용차의 해고 노동자들, 해직 언론인들,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들, 송전탑에 올라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 최저시급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사람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 물론 이 사람들이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다. 또 죽었다는 표현으로, 어떤 감정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앙갚음이나 복수의 뉘앙스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죽음이야말로 너무나 흔하고 평범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렇다.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보이지조차 않는다. 너무나 당연해서,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을 이상하게 보는 눈이 있다면, 그런 죽음이 어떤 조그만 감정이라도 불러일으킨다면, 이 세상 전체가 그렇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떤 곳을 보아도, 죽음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이데올로기는 무언가를 감추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다. 그런 죽음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잘 보여서,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우리 눈에 덧 씌워져 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 엊그제 우리는 그것을 나눠 받았다. 한 장씩 공평하게. 

물론 이런 생각도 지나친 비약이고, 지나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평범한 말들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나는 졌다는 표현이 부당하다고 느낀다. 나는 여전히 죽었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가 죽어야 한다고. 실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그냥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뭔가가 완전히 ‘죽어야’ 한다고. 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을, 그 죽음을, 패배라는 것으로, 그런 마음으로 덮어버려서는 안된다고.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패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죽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이 이해가 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것이, 다시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가 받아들이는 죽음은, 패배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우리가 죽이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죽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죽이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될까?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나는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나 자신의 마음 깊숙이 그것을 바라는지조차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든, 패배라고 하든, 죽음이라고 하든, 이번 선거에서 앞에 섰던 사람들,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방송인, 소셜테이너, 공개적인 지지자들, 단체 등등,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어떤 행위를 했고, 선택을 했고, 그렇게 해서 실패했다. 졌다. 패배했다. 그들의 이유가 겉보기와는 다른 것일 수도 있고, 탐탁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지극히 사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어리석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서두에 내가 말했던 것과 달리,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어떤 일이란, 아주 나쁜 일이다. 서두의 그 지인이 묻고 걱정했던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왜 없겠는가? 지난 정권에서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는 그들이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어쩌면 이것은 지나친 바람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그것까지 바라서는 안되는지 모른다. 좋다. 이건 나의 욕심이라고 인정하겠다. 나는 그들 중 누구도 죽지 않길 바란다. 어떤 의미에서든 말이다. 

마지막으로 투표 결과가 확정되는 순간에 내 트윗에 올렸던 문장을 다시 쓰겠다.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에브리맨, 필립로스


나는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낀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