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나가수'가 획득한 예술적 성취 본문

단상

'나가수'가 획득한 예술적 성취

물고기군 2011. 3. 25. 11:59

좋은 노래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예술적인 것은 좀 다르다. 사람들은 예술이 마치 필요한 것, 지켜야할 것, 어딘가 안전한 곳에서, 마치 신이 있는 곳 같은 데에, 보존돼 있어야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예술도 신도 그런 곳에 있지 않다. 신과 무관하게 6일을 살고, 단 하루 신을 만나러 교회에 가는것처럼 우리는 예술을 만날수 없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 위안 조화 평안의 모습이 아니라, 때때로, 아니 대개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아름다움이 숭고가 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기계적인 부분과 닮았고, 또한 일견 조화롭게 보이는 세계의 한복판에 드러나있는 균열과 찢김의 자국과 같다. 그것은 마치 세계의 끝과 같지만, 그 끝은 처음과 연결되어 있다. 배꼽처럼. 예술은 그러한 불가능한 지점에 위치한다. 적어도 그곳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마치 상처를 치유받는 것처럼, 또한 그러기를 항상 기대하지만 예술은 상처 그 자체다. 물론 상처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예술은 그렇게 언제나 세계 내에 포섭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예술은 자본주의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이다. 만일 그러한 세계 밖의 어떤 고상하고 아름다운 예술을 주장한다면, 또한 그러한 것만이 진짜 예술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누구든 즉각적으로 그것이 예외를 통해 이 세계를 닫으려는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러한 닫힘의 허상을 보여주며 이 세계를 끊임없이 열려있게 한다. 아니, 열린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언제나 어떤 폭력적인 형태로. 닫힌 세계를 찢어냄으로.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가수'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획득한 장면은 바로 탈락자가 부활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이 완전히 실패하는 지점이고 서바이벌이라는 자신의 형식을 내적으로 부정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진정 예술적 의미에서 사람들을 한없이 불편하고 불유쾌하게 만들고, 열광케 만들었다. 그것은 어떤 비평가가 순진하게 언급한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대중예술'이 진정으로 신자유주의 내부에서 폭력의 형태로 만들어 낸 가장 순수한 예술적 퍼포먼스였다. 그것은 거기에 포섭되지 않았더라면 결국 획득할 수 없는 성취였다. 

물론 그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그 성취의 열매를 훌륭히 계승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모든 예술적 경험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불쾌해하며, 또는 두려워하며 물러났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사람들은 아주 흔하디 흔한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일 뿐인 것을 못박았다. 예수를 사이비 예언자라고 손가락질한 것처럼, '나가수'를 신자유주의적 천박한 시장자본주의에 고상한 대중예술과 가수들을 팔아넘겼다고 손가락질 했다. 그들은 신이 우리 안에 있는 걸, 신이 인간이 되는 어떤 예술적 순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술이 이 천박하고 폭력적인 세계의 한복판에, 그것도 바로 그 세계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걸 견디지 못했다.

피디가 탈락자를 발표하는 순간, 그리고 이어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게 편집된 -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조차도 그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 침묵과 놀람, 그리고 재도전과 부활의 장면들. 이 십 몇분의 편집본은 아마도 아주 오랜 후에 분명 신자유주의적 '예능이 획득한 가장 예술적인 장면'들로 기억될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그 장면에 등장한 출연자도 피디도, 방송관계자도 심지어 시청자들도 결코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그 끔찍한 장면을. 그것을 욕하고 비난하며 마치 성급히 문을 닫고 봉인하고 싶은 것처럼 그것에 관계된 숱한 의미들을 히스테릭적으로 생산하지만, 결코 다시 그 '바라봄-체험' 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예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결코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마치 기계처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어떤 장면이다. 우리가 그러한 예술적 경험을 단지 일요일 오후 여섯 시에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뻔한 일요예능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한 없는 행운일 것이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정함에 대해서 - 너에게  (0) 2011.12.31
입장에 대해서  (0) 2011.09.11
'타진요'와 의처증, 타블로는 그들에게 진실을 줄 수 없다.  (0) 2010.10.09
유일한 없음  (0) 2010.08.25
외할머니의 볶음밥  (0) 2010.03.0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