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타진요'와 의처증, 타블로는 그들에게 진실을 줄 수 없다. 본문
사람들은 흔히 의처증에 걸린 남자가 믿지 못하는 건 아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의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믿을 만한가 믿을 만하지 않은가 라는 문제가 여기에 먼저 개입된다. 즉, 어떤 제3자가 있어서 그가 보기에 남편의 불신은 타당하다고 옹호할 수도 있다. 물론 또 여기에 제4자가 있어서 이번에는 아내 편을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의처증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즉 결국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다 해도 남편이 의처증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왜 그런가? 남편이 맞았는데, 그는 진실을 알고 있었는데, 왜 의처증일까? 그것은 정당한 의심이 아니었는가? 문제는 남편이 믿지 못하는 게 아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거꾸로 이번에는 아내가 외도를 하지 않았다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백 명이면 백 명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증거가 드러났다해도, 남편 또한 지극히 이성적으로 자신을 틀렸음을 인정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아내를 의심한다. 남편이 믿지 못하는 것은 아내나, 아내의 말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다른 무엇? 그게 무언가? 반대로 의처증이 아닌 남편, 우습게도 누가 봐도 명백하게 외도를 하고 있는 아내를 믿는 남편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믿음들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람둥이나 유부남의 뻔한 거짓말을 믿는 여자들. 물론 개별적인 사안마다 사연은 기구하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믿음이란 항상 다른 어떤 것을 믿는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가 법정에 나갔을 때 우리는 판사라는 개인의 판단이 지닌 무결성을 믿는 게 아니다. 그가 법복을 입고 판사석에 앉아있을 때 그의 말과 판단에 대한 믿음은 판사 개인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건 그의 옷과 자리에 체현되어 있는 상징적 권위이다. 우리는 우리 지갑 속에 있는 종이조각들이 천원이나 만원의 가치가 있다는 걸 어떻게 믿는가? 우리는 그것이 한낱 종이쪼가리, 몇 십원의 가치도 없는 종이장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만일 그 종이가 그 자체로 천 원이나 만 원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은 단순한 종이에 불과하니 다 찢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도 있다. 이런 종이쪼가리 때문에 사람들이 울고 불고 하니 얼마나 꼴사나운가, 마치 세상 사람들이 돈을 신처럼 모신다며 비웃고 경멸한다. 이 사람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의처증 환자기 믿지 못하는 건 아내가 아니다. 그가 잃어버린 건 상징적 허구, 대타자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믿지 못하는 것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지금 자신과 살고 있는 한 여자가 아니라, 세상의 아내, 아내성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처증의 원인에 대한 아주 쉬운 추측이 남편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외도라든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은 말 그대로 너무나 쉽다.)
이렇듯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어떤 대상이나 사실과 연결되지 않는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라는 말과 반대로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항상 일종의 상징적 우회가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진요’의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타블로가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타블로라는 경험적 개인이 지닌 특수성, 또는 그 내용이 학력에 대한 불신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의심의 시발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타블로 개인이나, 대한민국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학력이나 하는 쪽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너무나 순진하다. 또한 지극히 비정상적인, 우리와는 다른, 악플러들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쉽다. 이것은 물론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익명성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태도를 함축한다. 그러나 개인 타블로에 대한 비뚤어진 증오나, 학력에 관련한 이상한 열등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 카페의 명칭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들이 정말로 진지하고 절실히 '진실을 요구했다'고 보는게 왜 이상한 일이 될까? 그들이 보기에 문제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거짓이 판을 친다고, 너무나 많은 진실들이 가리워지고 뭍혀지고 있다면, 그들의 그 절심함은 어느 지점에서 지나친 것, 병적인 것이 되는 것일까?
때로 어떤 사람들은 마치 어떤 객관적인 증거, 사실들에 근거해서 우리가 충분히 정당한 의심과 지나친 의심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천안함 정부발표에 대한 의심은 타당한 것이고, 타블로에 대한 의심은 지나친 것이다. 또는 그 반대이거나. 하지만 우리는 또한 정말로 진실인 것이 뭍혀지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처음에는 진실이었던 것이 거짓이 되거나, 거짓이었던 것이 진실이 되는 공식적인 역사를 보고 배웠다. 그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도박을 하듯이 한 번은 틀리고 한 번은 맞고 그래야 하는 걸까? 그래서 나중에 그 승률을 따져 건전하고 상식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러나 여기에는 정보의 접근에 대한 불평등성도 존재한다는 점을 끼워넣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사안마다 다른 개인적 관심과 열의라는 변수도 끼어든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건의) 진실들을 열렬히 추구하기에는 개인의 능력은 한정되고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분명히 현재 이 시대가, 또는 이 대한민국 사회가 너무나 많은 의심들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 시대에 특별히 너무나 많은 거짓들이 횡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시 순진하다. 갑자기 어느날부터 아내가 의심스런 행동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아내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왜 갑자기 사람들이 믿음을 잃었는가? 왜 그들은 그렇게 병적인 의심에 빠져들었는가?
하지만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믿는 것, 상징적 허구가 가지는 권위를 믿는 것 또한 병적(증상적)이라는 점이다. 백번 양보해서 건강한 믿음(의심)과 병적인 믿음(의심)을 가르는 구분선은 너무나 희미해서, 심지어 그 구분선이 존재한다는 믿음까지도 의심해야할 지경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대는 믿음보다는 의심이 더 권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이 의심의 역사는 물론 데카르트적 의심에서부터 비롯된다. 모든 확실성, 객관성, 권위에 대한 의심. 이것이 근대의 출발이지 않는가? 정확히 말해서 아버지의 권위(오이디푸스)를 거부하는 후오이디푸스적 상황이, 갑자기 증가한 의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건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금지, 상징적 질서에 대한 근대의 반성적 거리는 물론 상징적 권위의 약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니, 심지어 탈권위화는 적극적으로 권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자식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학생들은 선생의 수업이나 강의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사회적 관계에 있어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가 무엇보다 가치있는 것이 된다.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대개 가부장적이거나 심지어 독재적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이는 두 가지 주체적 양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냉소적인 주체와 다른 하나는 도착적 주체다. 냉소적 주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나왔는지 나오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혹 스탠포드를 나오지 않았다해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나온 것이다. 진실은 어차피 자의적인 것이니까. 도착적 주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 진실을 밝히는 게 나의 임무다. 그들은 오히려 의심하지 않고 믿는 주체다. 도착적 주체는 타자의 진실을 안다고 믿는 주체다.
‘타진요’에 문제가 있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다른 누구들보다 더 의심병에 빠져 있거나, 악의적이거나, 병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이 행한 것의 결과가 한 개인에 대한 무자비한 마녀사냥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이 사회의 진실(정의)과 한 개인의 인권이라는 문제는 어떤 지점에서 적절한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의심이 타블로라는 개인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면, 즉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이 사회가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진실에 대한 믿음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단순히 이 사회가, 누군가 말했듯이 투명하고 공정해진다면 그들 모두가 평화롭게 일상적 삶으로 돌아가게 될까? 아니면 반대로 법과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위로, 전근대적이라 할만한 강력하고 권위적인 국가체계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우리는 더 편해지게 될까? 정의로운 언론이나 지식인 집단, 수많은 위원회들, 이제는 유행어가 되어버린 집단지성, 시민사회의 합리적 공적 담론같은 새롭지만 따져보면 낡은 권위적 형상들을 다시금 불러와야 할까? 하지만 그 다양한 권위의 집합체들 중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는 다시금 주체의 문제가 된다. 그렇담 (상징적 우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절대적인 이성적 능력(직관적 지성)을 획득하는 것만이, 그러한 주체가 되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는 것만이 최종적 결론이 될까? 물론 어떤 것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심지어 가능하지도 않다. 마치 타블로가 더 많은 증거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수많은 공중의 증명을 받는다 해서, 또 그들을 공적인 법과, 이번에는 거꾸로 그들에 대한 일반대중의 마녀사냥으로 단죄하고 낙인찍는다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층위에 있다. 분명한 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언론이나 젠체하기 좋아하는 냉소주의자들이 말하는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자유주의적 후기 자본주의적 상황, (탈)근대적 반성적 주체성의 양태와 무관하지 않다.
‘타진요’는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의 줄인말이다. 이것은 그 카페의 이름이다. 나는 그들이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 또는 요구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전부 다는 아닐지 몰라도 말이다. 다만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을 결코 타블로는 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사태는 여전히 전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MBC도 대한민국 검찰도, 심지어 미국 FBI도 줄 수 없다. 그들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것을 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진실이 저기 저 바깥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한 가운데,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보지 못하고, 심지어 보았다 해도 외면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이 요구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가 그것을 얻었을 때, 그것과 대면했을 때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