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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그녀와 고양이 본문

소설

그녀와 고양이

물고기군 2012. 9. 20. 23:52

“봤어?”

“뭘?”

“고양이.” 그녀가 말했다. 

“어디서?”

“지금 막 우리 앞을 지나갔잖아.”

“우리 앞?”

“그래. 우리 앞을 막 지나서 저기, 저 골목 쪽으로 들어갔어.”

“골목이라고?”

그녀는 보도 오른편에 보이는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은 마치 그녀가 가리킨 그 순간, 생겨난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탓일 것이다. 나는 새삼 우리가 걷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장소였다. 우리는 영업이 끝난 은행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저기다 주차시켜면 되겠네 하고 말했다. ATM기계가 놓인 무인점포는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 나는 마치 그것이 꿈속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내내 아무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예전에 이곳에 와봤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숱한 거리를 걸어 다녔으니까. 하지만 그렇다해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거리 대부분이 공사중이었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운동장처럼 평탄하게 다져진 공터가 널따랗게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그것보다 더 작은 공터도 남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빠진 이처럼 휑하니 드러났다. 바닥공사를 마친 곳은 매끈한 시멘트 블록 위로 철근 들이 묘비처럼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남은 건물들도 모두 떠나버린 듯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도 가로수와 가로등만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우리는 마치 영화 세트장이거나 가치 있는 옛 건물들을 보존해놓은 커다란 박물관을 걷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멈춰 서서 한동안 골목을 바라봤다. 보도를 따라 늘어선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그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울창한 은행나무 가로수 그늘 속에 있다. 가끔씩 그 죽어버린 것 같은 거리에도 차가 들어와서, 반듯하게 구획된 이면 도로를 따라 무언가 찾는 것처럼 느린 속도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찾아낸 듯 속도를 내서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순간 나는 골목 입구에서 무언가 붕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랐고, 가만히 바라보자 풍선 같았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가 물었다.

“고양이가?”

“따라가야 할지도 몰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건 토끼지.”

하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사실처럼 느껴졌다. 토끼든, 고양이든. 실제로 그게 무엇이든.

“못 봤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아니었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몰라. 고양이든, 아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그래 중요하지 않지. 그게 우리 앞을, 여기서, 저쪽에서부터, 저쪽으로 지나갔다는 게 중요한 거야.”

“따라갈 거야?”

그녀는 여전히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서 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다. 내가 사랑했던 얼굴. 한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얼굴. 나는 그녀가 원하는 만큼 그곳에 멈춰 서 있도록, 자신이 그곳에 서 있다는 것에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가만히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마치 나 자신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은행나무의 넓은 그림자 속에서. 

“못 봤어. 그렇지. 못 봤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한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이 사라진 것처럼 느꼈다. 아니면 내가 사라졌거나. 시간이 흘렀다. 눈치채지도 못했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우리가 지금껏 걸어온 보도 쪽을 바라보고, 다시 앞에 놓인 보도를 봤다. 아마도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것 같은 길을. 물론 그녀가 고양이를 찾으러 이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나만 본 거야? 그런 건가?”

“네가 본 건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라.”

“그건 아까 한 말이잖아.”

“무언가……”

“그럼 그게 뭐였을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몰라.”

“아무것도 아닌, 뭐?”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잘못 봤다는 거지.”

그녀는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를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다.

“사실은…… 아무것도 우리 앞을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아니, 어쩌면 내가 잘못 봤을지도 몰라. 내가 보지 못했을지도.”

“하지만 우린 함께 걷고 있잖아. 앞을 보면서 걷는다고. 네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는 거야?”

“그래. 우리 함께 걷고 있지. 같은 곳을 보면서.”

“근데 어떻게 내가 본 것을 네가 못 볼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언제나. 반대로, 다른 곳을 보면서 서로 같은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녀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간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나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고양이 울음소리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있는 만큼 참는다. 그리고나서 천천히 설명을 시작한다.

“네가 잘못 봤을 수도 있고,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그건 고양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실제로 아무것도 우리 앞을 지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너 자신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 넌 아까부터 계속 이렇게 굴고 있어.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자꾸만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 있다고. 언제까지 너한테 거짓말할 수는 없어.”

“내가 헛것을 본다는 거야? 내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니야. 그렇다 해도, 그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해. 실제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건 확실해.”

“언제부터.”

“어?”

“언제부터, 내가 없는 것을 보기 시작했던 거야.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 거야?”

글쎄,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부터.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어떻게 더 참을 수 있겠는가? 애초에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처음부터,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서는 안 되었다. 

내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팔을 뻗는 순간, 그녀가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나를 보고, 앞으로 뻗은 내 팔을 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들려?”

“뭐가?”

“고양이 울음소리.”

나는 진절머리가 났다. 팔을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자신이 가리킨 골목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미쳤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뭐가 들린단 말인가? 그녀는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뭐라고 했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골목 안쪽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그녀의 뒷모습. 한때. 내가……. 그만하자.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세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 양팔을 되는 대로 바닥에 늘어뜨린다. 나는 조금 울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언가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고양이는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를 봤다.

“이리와.” 나는 손짓했다.

고양이가 조그만 입을 벌려 무언가 소리를 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입을 다문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바닥에 앉아 서로를 봤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것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금세 내 손이 닿지 않는 쪽으로,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그녀가 가리켰던 골목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몇 발짝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되지도 않는 거리였다. 나는 금세, 골목 입구에 선다. 빨간 풍선이 다시 날아올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까만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풍선을 바라보다가, 다시 골목을 바라봤다. 고양이는, 그것은, 그 무언가는 이미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실제로 그곳에 없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를 본다. 그게 언제부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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