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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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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공장지대

물고기군 2013. 1. 20. 23:48

그는 몇 년째 돈을 벌지 못했다. 생활은 부모님이 매달 부쳐주는 돈으로 꾸려갔다. 동생도, 가끔 건너 뛰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대체로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탰다. 그는 처음 얼마간, 한 반 년 정도는 그런 생활에 굴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굴욕감도 자신이 극복해야 할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여기기로 했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장사나 사업을 하기에는 주변머리가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두 번의 사업 실패 이후에 깨달았다. 그는 웬만하면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했다. 동료나 거래처나 직원이나 심지어 손님이나, 누구도 만나지 않는 그런 사업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가 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뭔가 일을 해야 했지만, 그는 아직 자신에게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그는 의류사업에 관심이 갔다. 몇 년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신의 옷조차도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또 어쩌면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몸뚱이가 어떤 옷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느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도무지 맵시가 나지 않았다. 그후로 옷에 관심을 끊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옷을 사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는 진지하게 의류 쇼핑몰을 해볼까 생각했다. 심지어 패턴이나 재봉을 배워서 직접 옷을 제작하는 일까지 고려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원을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한지가 몇 달 전인데도 그는 단지 옷을 사기만 할 뿐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 옷들이 썩 잘 어울렸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오늘 받아볼 옷 생각이 났고, 택배 상자를 개봉할 때마다 마음 깊이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거울이 무슨 마법을 부리는 걸까? 그가 사는 옷은 대부분 값산 보세 옷들이었다. 그리고 구입한 제품의 반 가까이를 한 번 입어보고나서 반품했다.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러기도 했지만, 때로 그렇게 반품하려고 구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거울에 한 번 비쳐보기 위해서. 그렇다 해도 결국에는 돈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단지 몇 십 만원이었다. 카드 서비스로 그 정도는 별 부담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먹는 거나, 다른 지출을 줄여서, 즉, 그 다음 달에 그렇게 해서 금방 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하듯이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몇 백 만원이 되었다. 

그는 동생이 일하는 공장에 찾아갔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면서 공장지대에 도착했을 때는 집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도 넘어서였다. 그러고도 다시 마을 버스 같은, 공장지대 내를 운행하는 조그만 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들어갔다. 그는 문득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떠올려봤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일 때는 반드시 부모님 집에 모여 식사를 했으므로, 금방 그 날짜를 추측해볼 수 있었는데(약 두 달전에 어머니 생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동생의 공장에 와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나서 곧바로 취직했으니 벌써 십 년도 넘게 동생이 다니는 공장이었다.

공장이름을 확인하고 들어가려는 데 수위실에서 붙잡았다. 그는 동생 이름을 댔다. 수위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공장은 한 채 건물만 해도 엄청나게 커 보였는데, 그런 건물이 뒤쪽으로 몇 채 더 이어져 있었다.

직원 휴게실은 식당도 겸하는 곳으로 역시 엄청나게 넓었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백 여개는 돼보였다. 작업 중이라 그런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그 혼자 뿐이었다. 

동생은 유니폼 점퍼를 입고 있었다. 처음보는 옷이었다. 바지는 사복인 것 같았는데, 보통의 정장 바지로, 그가 보기에는 바지단이 너무 넓었다. 동생은 직접 올 필요는 없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네가 일하는 곳도 보고 겸사겸사 온 거라고 말했는데,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금방 테이블에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모두가 동생과 같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만 다른 옷이었다. 말을 하는 건 대개 동생 쪽이었다. 그의 생활에 대해서 뭔가 묻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동생의 배려를 느꼈다. 그것이 그를 오히려 초조하게 만들었다.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나눠피웠다. 어느새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사람들이 줄지어 건물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동생 쪽을 바라보았다. 문득 동생이 둘이 아주 어렸을 때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둘은 아파트 뒷편 한적한 도로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천 원짜리 지폐를 발견했다. 그가 돈을 주워 주머니에 챙겨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젊어보이는 남녀였다. 보자마자 그는 단박에 그들이 돈의 주인임을 알아챘다. 바닥을 살피면서 그들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꼬마야, 여기서 혹시 천 원짜리 못봤니? 여자쪽이 물었다. 남자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난 깜짝 놀랐어.” 동생이 말했다. “형이 못봤다고 했을 때 말이지. 난 당장 그 두 사람이 형의 주머니를 뒤질거라 생각했는데…… 안 그랬지.”

그는 가만히 있었다.

“왜 그랬을까?”

“뭐가?”

“그냥 왜 그랬는지 궁금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속이 미쓱거렸다. 동생의 넓은 바지단이 눈에 들어왔다. 형편없는 옷이었다. 그는 동생이 좀 더 멋지게 옷을 입길 바랐다. 동생은 형을 바라봤다. 어쩐지 형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젊어진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형은 아주 멋지게 보였다. 살도 많이 빠지고, 얼굴 피부도 좋아졌다. 옷도 아주 멋졌다. 마치 연예인 같다고 동생은 생각했다. 쫙 달라붙는 바지에, 조금 헐렁한 후드 야상을 입고 있었다. 동생은 형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공부도 나았고, 운동이나 예술적 재능이라 할만한 부분에서도 나았다. 동생은 자신이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느꼈다. 사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냥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 성실성을 누군가는 훌륭하게 여기겠지만 정작 스스로는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동생은 그때 형이 그들에게 천 원짜리를 못봤다고 했을 때 정말 놀랐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안내판을 봤더니 배차간격이 한 시간 가량 되어서, 그는 걷기 시작했다. 가다가 버스가 오면 올라탈 생각이었다. 밤이 되었고,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도로에도 차가 거의 없었다. 마치 비가 내린 후처럼 가로등 불빛에 도로가 번들거렸는데, 아무리 기억해봐도 언제 비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공장지대는 계속 이어졌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건물들. 철망. 송전탑. 그리고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가로등이 반듯하게 줄을 맞춰 저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는 문득 고독감을 느꼈다. 어쩐지 쌀쌀하게 느껴져서 후드를 뒤집어 썼다. 도로 한 가운데 이상하게 기차 레일 같은 쇠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그 가운데로 걸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때도 이렇게 혼자 걸었던 것 같다. 동생에게 받은 돈으로 카드 빚을 갚는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 돈으로 해야할 일은 옷을 사는 일이었다. 그는 그 생각만 했다. 얼마 전 노트북 화면으로 보았던 자켓 생각을 했다. 진짜 멋진 옷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매일 집에만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바닥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가 문제일까? 왜 나는 입고 나갈 데도 없는 옷들을 구입하는 걸까? 그들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신이 그 돈을 못봤다고 하리라는 걸 짐작조차 못했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 그는 그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려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득 아직도 그들이 그 돈을 찾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지상을 헤메는 게 아닐까. 그는 괴로움을 느꼈다.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 바닥에 떨어진 천 원짜리를 봤을 때, 자신이 느꼈던 말 못할 행복감이 어디서 왔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고작해야 천 원짜리일 뿐인데. 그것으로 살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천 원어치 뿐인데. 그는 도저히 그 돈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돈은 이제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동생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멈춰섰고, 공장지대를 둘러봤다. 그가 본 옷은 정말 멋진 옷이었다. 단지 그게 자신한테 어울릴지가 의문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든 게 그 천 원짜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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