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각주구검 본문
배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실수로 강물 속에 칼을 빠트렸다. 그러자 그는 즉시 뱃전에 무언가 표시를 한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 거냐고 묻자, 그 사람은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내 칼을 빠트린 자리에 표시를 하는 거요,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게, 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다. 그날, 아, 너무나 눈부셨던 날, 그녀는 내게 이 고사를 얘기해줬다. 각주구검. 칼을 찾기 위해 배에 표시를 하다. 그날 우리는 어느 유원지에서 2인용의 조그만 배를 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노를 젓는 동안 내 맞은 편에 앉아, 배 밖으로 팔을 내밀어 마치 우리가 지나온 길을 표시하듯 강물 속에 손가락을 담그고 있었다. 배가 나아감에 따라 그녀 손가락이 마치 금을 긋듯이 표면 위에 긴 자국을 남기는 걸 나는 바라보았다. 초목은 푸르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바람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미약한 공기의 흐름이 부드럽게 맨살을 감쌌다. 아마 계절은 봄이거나 가을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너무나 행복한 한 때였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누가?
“칼을 물에 빠트리고 배에다 표시를 한 사람. 그렇지 않아? 누구도 강물 속에 빠트린 칼을 찾을 수는 없어. 배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물은 너무 깊으니까. 그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어. 하지만 그는 뭔가 해야한다고 느낀 거지.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사람이야. 하지만 그렇게 배에다 표시한 사람은 결코 잊지 않아. 그렇게 자기 마음 속에, 금을 그어두는 사람은.”
“금을 긋는다고?”
“응.” 그녀는 강물 속에 담궜던 손을 끄집어 내어 자기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는 마치 무언가를 새기듯이 손가락으로 가슴 한 가운데를 짧게 그었다. 그러자 나는 그녀 가슴에 그어진 숱한 금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마다 새긴 금들. 그녀는 가만히 그 자국들을, 아무리 채워도, 덧칠해도 손가락으로 천천히 더듬으면 이내 느낄 수 있는 그 틈들을 안타깝게, 슬프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황홀하게, 행복하게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물새 한 마리가 건너편 숲 속에서 무언가에 놀란듯이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후드득 거리는 소리가 주변의 고요함을 기분좋게 깨트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노를 젓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배는 조금씩 어딘가로 흘러갔다. 나는 물새가 하늘 저편으로 한 점이 되어 영원히 사라진 후에야, 다시 노를 잡았고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정하기 위해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부신 미소를 바라보았고, 내가 그때껏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또 앞으로 무엇을 잃어버려야 하는지 슬프게 깨달았다.
시간은, 그래, 정말 강물처럼 흘렀고,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왜 헤어졌는지, 누가 원해서 헤어졌는지, 그리고 그때의 내 심경이 어땠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나는 그 세세한 내용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을까? 우리가 한 게 정말 사랑이었을까? 이런 유행가 가사 같은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때때로 그런 질문을 던져보기는 한다. 하지만 내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게 무엇이었든, 그녀와 만나고 헤어졌던 일은 내 인생에 그다지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그녀와의 만남이 너무 짧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날 그녀가 말했던 대로, 누구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손톱이든 뭐든, 날카로운 무언가를 이용해서 그것을 잃어버린 순간에 어딘가에 표시를 해두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그런 표시를 해둔 것일까? 나도 모르는 새에?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시간만큼 수많은 기억들 중에, 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순간에, 그녀와, 그녀의 얘기와, 그녀와 함께 했던 어떤 날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걸까?
인생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뒤돌아 생각하면 그 모든 일들이, 단지 하나의 일이, 다른 하나의 일과 구별될 뿐,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조차 의문스럽다. 어떤 일도, 다른 어떤 일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일들은, 원인과 결과로 촘촘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모든 일이 하나의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런 생각과 말들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이를테면 이제 나는 인생에 대해 말할 자격이 생긴 것 같다. 사랑은 중요하지만, 나는 그만큼 더 중요한 일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변명같지만 나는 그녀와 헤어진 일에 대해, 이런 관점을 비춰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은 빛났지만, 내 인생의 이야기속에서 그녀의 역할은 그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품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점차 품위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뭐가 옳고 그른지, 예의나 염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는 점차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다. 내게 중요한 건 품위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서 나는 그 임무를 훌룡히 수행했다고 믿는다.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결혼생활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키워냈으며, 손녀 둘과, 손자 하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바로 이 병실에 모여 있다. 이것이 그들 모두가 여전히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 모든 게 내가 품위를 지켜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 그녀일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침에 나는, 의사가 내가 듣는 줄도 모르고, 내가 오늘 밤을 넘길 확률이 50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 아내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나는 이제 산소호흡기를 떼도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가 눈을 뜨고 있어도, 바이탈 기계에 똑똑하게 내 심장 박동이 그래프로 나타나고 있어도, 지금 병실에 있는 나의 가족들은 나를 거의 죽은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지금처럼 의식이 또렷한 적은 근 몇 달동안 처음인 것 같다. 아마 이것은 죽음이 내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뜻하는 것이리라. 다른 무슨 뜻이 있을까? 인생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 나는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고 싶다. 나는 어쩌면 이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렇게 술한 유혹들을 견뎌냈던 것일까? 비겁과 굴종을 감수하고, 또 냉혹함과 잔인함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걸까? 나를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친구도 있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가족이 있고, 그들이 내 마지막까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을 증명해줄 것이다. 나의 품위를……. 그런데 왜, 그녀가 자기 가슴에 대고 그었던 그 짧은 금이 떠오른 걸까?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사람이야. 그녀가 말했지. 나는 지금껏 뭘 잃어버렸던 걸까? 내 가슴에는 얼마나 많은 표식들이, 금들이 그어져 있는 걸까? 내가 그렇게 했을까? 나는 내 눈 속에 담긴,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내 가슴 속에 담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 그렇군. 이제 그들이 나를 잃어버리는 거야. 그들이 나를 잃어버리고 자기 가슴에 금을 그어야 할 때가 왔어.
나는 배를 타고 있다.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조금씩 어딘가로 흘러간다. 마치 그날처럼. 눈부신 그날처럼. 그러나 금방 나는 알게 된다. 내 가슴 속에 금들이 자라나고 있음을. 인생 전체가 그 모든 금과,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 반대로 그 틈을 통해 흘러나와 강물이 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배를 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금을 새길 수 있는 배도 없다. 온통 푸른 물뿐이다. 나는 이제 시간 그 자체인 것처럼, 흘러가는 물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인생은 그 금 자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다. 나는 그녀가 내 옆에서 함께 흘러가는 것을 본다. 그녀가 묻는다. 왜 여기에 있어? 나는 칼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