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시승 본문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행복’이라는 단어였다. 3류 드라마, 또는 재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기자들처럼, 그들은 행복한 커플이라는 지문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다. 만일 그들이 연기자라 한다면, 그들의 연기는 3류가 아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그 눈부신 커플을 보자마자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으니까. 내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슬픔이 나에게 어떤 힘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나는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절망감이라 불러야 할까? 그렇다면 절망감은 무기력과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다준 슬픔은 고통이었고, 그것은 마비상태에 빠져 있던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마치 커다란 바늘로 내 신체의 가장 약한 부분, 등 같은 데를 푹 찔린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시승을 원했다. 둘 다 편안한 복장이었다. 마치 동네 편의점에 음료수라도 사러 나온 것 같은. 둘 다 샌들이었고, 양말도 신지 않았다. 여름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즉, 나와 내 동료들은 정장 재킷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차를 구입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당장은 아니라도, 이 전시장이 아니라도, 그들은 몇 달 내로 차를 구입할 것이다. 그것도 반드시 수입차로. 나는 이 일을 십 년 넘게 해왔고, 자연스럽게 고객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100퍼센트는 아니라도, 90퍼센트는 맞았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숨겨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사랑이나 재채기처럼, 그 사람이 가진 돈은 숨겨지지 않는다. 물론 가난도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시승차에 올라 시동을 켜자 계기판에 시간이 나타났다. 점심 이후로 일부러 시계를 보지 않았다. 이런 건 마치 백화점이나 도박장에 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현실을, 현실의 시간과 공간, 그 기준들을 잊어버리도록 의도된 장소.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도 그런 종류의 비현실이었다. 여기서 걸어나가면 또 다른 현실이 있기를 바란 걸까? 시계는 3시 30분을 가리켰다. L은 4시까지 입금하지 않으면 곧바로 고소장을 접수한다고 했다. 오늘 아침이었다. 점심때까지 계속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다 방금 전, 전화나 문자, 어떤 형태의 연락도 자신에게 취할 필요가 없다고, 아니 취하지 말라고 문자가 왔다. 그 시간이 30분 남았다.
앞자리 조수석에 여자가 앉았다.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차는 여자가 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소형차고, 최근에 공격적으로 가격책정을 했다 해도 3천 중반의 가격이었다. 내가 P에게 선물했던 가장 비싼 선물은 3백짜리 가방이었다. 이번에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은근히 5백짜리 가방을 원했다. 친구들도 다 받았다고 했다. 나는 문제 없다고 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상황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 일이 나빠지기 시작한 건 훨씬 이전부터였다. 5년 전만 해도, 아니 3년? 2년? 그때까지만 해도 차 한 대를 팔면 150 이상이 떨어졌다. 한 달 수입으로 천을 올린 적도 있었다. 굳이 통계를 보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신호대기에 걸려 주위를 둘러봐도, 수입차는 대세였다. 하지만 늘어나는 고객보다, 영업사원이 더 많았다. 그래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내 고객 리스트만 해도 천 명이 넘었다. 그중에서 L은 최상급에 속하는 고객이었다. 그와는 따로 고급 바에서 만나 술을 마실 정도로 깊은 친분을 유지해왔다. 그가 연결해준 고객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그를 탓할 마음은 없다. 어차피 비즈니스다. 계약을 어긴 건 나였다. 애초에 중고차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었다. 회사를 믿는 게 아니었다. 김팀장이 손을 뗐을 때, 나도 털고 나와야 했다. 하지만 내게 정말 돈이 필요했다. P에게 사줘야 할 5백짜리 가방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내가 모든 사정을 다 말했다면, 아아, 그럴 수 있었다면, P도 나를 이해해줬을까? 우리가 봤던 집, 우리가 계약한 결혼식장, 그리고 예물들. 그 모든 걸 내가 이제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면, 그래도 그녀는 나와 결혼해주려 했을까?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혼자 차를 몰고 돌아가던 길은 잘 기억났다. 그녀를 내려주고 그 방향으로 차를 몰다 첫 번째 신호등에서 유턴을 해야 했다. 나는 그 길을 수 백번 운전했다. 그런데도 그 마지막 길, 도로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그럴까? 나는 그날이 마지막인지 몰랐는데.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도로와 거리. 차도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유턴차선에 차를 세우고 정면을 바라봤을 때, 거리 양옆에 늘어선 전면이 모두 유리로 덮인 최신 빌딩의 높은 창에는 불빛이 많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며 신호가 바뀌기를 계속 기다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센터페시아의 모니터를 터치하면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음향효과 같은 것들. 의식하지 않아도 입에서 줄줄 말이 흘러나왔다. 그 시선의 한 귀퉁이에 여자의 짧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눈처럼 하얀 허벅지가 걸려 있었다. 차의 주행감이나 성능에는 별 관심이 없던 여자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직접 해보라고 했다. 뒷자리의 남자는 소음이나 실내크기에 대해 처음에 몇 마디 한 것 외에는 별말이 없다. 그러면서 계속 여자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여자는 곤란하다는 듯, 잘 모르겠다고 했다. 최근에 운전면허를 딴 것 갈았다. 여자는 예쁘다기보다는 귀염성있는 얼굴이었다. 키도 작은 편이었는데, 볼륨이 있었다. 나는 다시 가슴이 옥죄어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P의 허벅지를 만지던 기억이 났다. 항상 운전할 때면 그랬다. 여자가 터치 모니터를 보려 몸을 기울이자 향수인지 화장품 냄새인지 좋은 냄새가 났다. 그녀의 허벅지, 가슴,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것 같은 통통한 볼, 매끄러운 피부. 그 모든 게 너무나 분명하게 내 눈에 보였다. 갑자기 그 존재감이 너무나 커져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뒷자리의 남자는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 그에게는 그녀가 일상일 테니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그리고 누리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3천5백짜리 차를 선물로 줄 수 있는 인생이란...
나는 다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행복이란 말은 너무 흔해서, 이제 거의 아무 뜻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간, 아, 그게 언제까지일까, 내게 그런 감정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도대체 이제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나는 원래 낙관적인 인간이다. 걱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도, 걱정했던 만큼,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믿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고통은 없었다. 단지 마비될 뿐이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시승코스의 반을 왔다. 이제 유턴을 해서 돌아가야 했다. 나머지 반은 고객이 직접 몰아 볼 수 있게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이제 유턴을 해서 차를 세우고는 운전대를 뒷자리의 남자에게 넘길 것이다. 유턴차선에 차를 세우고 나는 신호를 기다렸다. 전방을 바라봤을 때, 반대편에서 오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옆에도 차가 없었다. 이게 뭐야?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나는 마치 옆자리에 P가 앉아있는 것처럼 느꼈다.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공간. 여자가 핸들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잡아 자기 허벅지 쪽으로 끌어당겼다. 만져도 돼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3시 30분. 변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백화점이나 도박장 같군. 여기서 나가면 또 다른 현실이 있을까? 만지고 싶지 않나요?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시승일 뿐이다. 나는 이런 인생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핸들을 꺾고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앨범커버 : Nine Inch Nails [Year Zero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