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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소년(일반적으로 고등학생 나이를 소년이라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정신연령으로 따지면 더 쳐준 셈일 것이다.)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다.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소년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것처럼 그 사랑은 실패했다.소년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인근 여고의 여학생이었다. 소년은 그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뻤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누구라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예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소년은 사랑에 빠지지 못했을 것이다.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이 판단하기에 자신이 넘볼 만큼 예뻤다. 이것이 소년이 아는 것이었다. 저 정도 여자라면 나랑 사귀어줄지 몰라.소년이 아는 것이 또 하..
배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실수로 강물 속에 칼을 빠트렸다. 그러자 그는 즉시 뱃전에 무언가 표시를 한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 거냐고 묻자, 그 사람은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내 칼을 빠트린 자리에 표시를 하는 거요, 나중에 도로 찾을 수 있게, 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다. 그날, 아, 너무나 눈부셨던 날, 그녀는 내게 이 고사를 얘기해줬다. 각주구검. 칼을 찾기 위해 배에 표시를 하다. 그날 우리는 어느 유원지에서 2인용의 조그만 배를 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노를 젓는 동안 내 맞은 편에 앉아, 배 밖으로 팔을 내밀어 마치 우리가 지나온 길을 표시하듯 강물 속에 손가락을 담그고 있었다. 배가 나..
우리는 돈이 필요했다. 멀지 않은 도로에서 빗속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타이어 소리가 머릿속을 울려대는 잡음처럼 들려왔다. 담배를 비벼끄고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아래엔 빨간 바탕에 하얀 꽃무늬가 있는 플로어 스커트. 결코 고상한 색조합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뭐든 해야겠어.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단 말이야.” “뭘, 어떻게 할 건데.” “은행을 털자.” 그녀는 나의 제안을 묵살했다. 나도 사실 그냥 해 본 소리에 불과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은행보다, 우체국을 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