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희망에 대해서 본문

단상

희망에 대해서

물고기군 2003. 8. 24. 19:12

나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물론 무엇보다 내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 내 자신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이건 아주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모든 행복들을 나는 처음에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이 모든 행복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불행한데 나 혼자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인거다. 이건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이제 그 ‘연결되어 있음’에 집중해보면 전혀 새로운 가능성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얘기가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결론으로 이끌어진다.
이를테면 며칠 전 티브이에서 현대의 도인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는데, 그들은 깊은 산속에 혼자 살고 있다. 17년간 지리산의 어느 토굴 속에 살고 있다는 어느 도인은 인터뷰에서, 깨달음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죽음이 겁나지 않아요. 나는 그 말이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인터뷰라는 게 지극히 한정된 의미만을 전달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과, 깨달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모든 자살자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인가? 물론 문제는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비유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나는 결국 죽음이든 두려움이든, 그것을 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에 관한 얘기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미래란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꿈이라는 말과 전망이라는 말. 어떤 말들을 쓰고 있다. 무지개도 있다. 무지개는 무척 아름답지만, 어쨌든 누구도 무지개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입버릇처럼 앞으로 무슨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항상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잘 알 수 있는 사실은, 현재 그 사람이 매우 불행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행복한 사람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을 거라는 것도 느꼈다. 어떤 일들은 확실히 가능성, 또는 미래라는 개념 속에서 잘 파악되고는 한다. 그 일들은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아직 원인들은 확실히 결과를 이끌지 못했다. 심지어 원인은 아직 작동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런 척 할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미래란,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고,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통해, 또는 과거의 이미 일어난 일의 순차적인 과정을 통해 그 가능성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없음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일들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 가능성이 아주 많았다면 우리는 그 일을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래는 아주 가혹한 것이다. 그것은 대개 정해져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마치 내 자신이 누구인지, 나는 때로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단지 철학적인 메타포일 뿐, 대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어떤 가능성도 완전히 제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전히 희망의 메커니즘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불행을 - 만일 불행하다면 - 견뎌낼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무기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이런 말은 상당히 위험하지만,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이란 것이 우리를 옥상의 난간에서 물러서게 해준다고 해서, 단지 그뿐인 것만으로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깨달음이란 것이, 지리산의 그 도인의 말처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뿐이라면, 그것이 무슨 깨달음이 될 것이란 말인가? 그것이 누구를 위한 깨달음이란 말인가? 왜 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만일 그 도인들이 - 다큐멘터리는 그 도인들의 숫자가 약 천명쯤 된다고 추산하고 있는데, 한 군데 모여 어떤 마을을 형성한다면 그 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은 물론 정화조일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도시의 발달은 하수시설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하수도를 만들고, 누군가는 정화조에 담긴 똥들을 퍼내야 한다. 마을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하수와 정화 시설의 시스템은 더욱 정교해지고 체계적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쪼개서, 그런 문제에 할애해야 한다. 물론 똥을 퍼내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통해서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어째서 산으로 들어갔을까? 나는 결국 그들이 산에 들어간 이유가 정화조에 있다고 본다. 그들은 똥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 주제에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이 글을 그들이 읽는다면, 그들은 모두 모여 단체를 만들어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할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은, 그들이 아무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결코 이 글을 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 맘대로 지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이란, 이런 경우에 아주 비겁한 행위가 된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한 건대 나는 그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가능하다면, 똥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똥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지어 사람들이 입으로 발음하기조차 꺼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똥을 누고, 정화조를 채워간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일은 반복되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결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한정된 가능성을 지닌, 우리의 헛된 희망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나는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눈앞에서 지금 이 시간에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만, 나는 그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 세계의 어느 건물, 어느 옥상에는 난간을 붙들고 있는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다. 어떤 불행한 일들이 나를 비켜가고, 또 내 자신이 과연 그러한 행운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 번 살고 싶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 이제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 옥상으로 날아가서 그들을 만나보자. 그들의 고민을 들어보고, 그들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은 사실들을 알기 위해 노력해보자. 그리고 나를 비켜간 불행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희망의 쵸콜렛을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내어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옥상 난간을 붙들고 있는 그들의 손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쥘 수 없다. 무언가를 쥐려고 손을 펼치는 순간 그들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든다. 그리고 나의 상상력을 책망한다. 어째서 나는 이런 곳에 날아왔을까?
나는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고 느낀다. 물론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무엇보다 내가 아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여전히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나는 희망의 쵸콜렛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주 달콤하고 칼로리도 높다. 얼마간은 걱정이 없다. 하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 다음의 다음은? 그리고 너는? 옥상은? 정화조는? 이 모든 일이 과연 상상력에 의한 것일까? 그것이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는 것은, 과연 희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나는 그 모른다는 사실을 통해 너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자 너는 이렇게 내게 소리친다.
네가 한 짓을 생각해봐.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나는 할말을 잃는다.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쵸콜렛은 나의 체온의 의해 녹아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그것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내 손에 늘러 붙어 있다. 나는 손을 펼쳐 눈앞으로 가져간다. 그것은 아주 끈적끈적하고, 역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아주 더러웠으며, 나는 처음에 그것이 똥 같다고 생각했다. 역겨움에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곧 그것이 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내 몸에는 상처가 없다. 그것은 내 피가 아니라 누군가의 피인 것이다. 내가 흘린 피가 아니라, 누군가가 흘린 피다. 내가 쥐고 있던 것은 그것이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의 뒤통수  (0) 2005.06.04
목도리  (0) 2003.12.02
택시  (0) 2003.07.08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는 걸까? II -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서  (0) 2003.03.14
마지막 손님  (0) 2003.03.1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