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그녀의 뒤통수 본문

단상

그녀의 뒤통수

물고기군 2005. 6. 4. 16:38

예전에,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대학 1학년 때, 알았던 여자는 자신의 신체 중 가장 매력적인 부분으로 뒤통수를 꼽았다. 한번 만져보라고 해서, 그때껏 손 한번 제대로 잡지 않았던,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사실 우리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해서 나는 그 당시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또 그녀도 딱히 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말로는 남자 자체에 아직 흥미가 없다고 했지만 그건 아직 적당한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그녀에게 적당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셨다. 영화를 같이 보기도 했다. 생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케이크를 사서 카페 같은 곳에서 촛불을 켜고 조용하게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다. 그런 우리가 자주 만났던 시기는 3,4개월 정도였지만 그 시기를 지난 후에도 곧잘 연락을 하고 만났던 것 같다. 그녀와 만난 마지막 날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마치 내가 그녀의 뒤통수를 만질 때 눈을 감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눈을 감고 머리 속으로 그녀의 뒤통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그것은 작고 반듯하고 예쁘게 생긴 뒤통수였다. 흔히 말하는 짱구였는데 아래편으로 손을 쓸어내리며 목과 연결되며 떨어지는 선의 진행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마땅히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 그런 걸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사람의 뒤통수에 불과한데, 어쩐지 뒤통수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치 그것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그녀 자체인 것 같았고 가만히 손을 대고 있으면 결코 그녀가 선뜻 보여주지 않을 그녀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 자신의 비밀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살고 있는 삶, 조그만 어린아이였다가 신체가 커지고 사춘기를 겪고 이제 어른이 되어 계속 나이를 먹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한 인간 존재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깊은 숲에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나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 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 네 발 동물들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눈을 뜨자 발자국 소리는 멈춘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과 나무들의 그림자만 보일 뿐 어디에도 동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 나를 보고 있다. 그것은 분명 두려워할만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아. 앞으로 나와 봐. 해치지 않아. 해치지 말아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괜찮은 일  (0) 2008.02.28
신파에 대해서  (0) 2007.01.07
목도리  (0) 2003.12.02
희망에 대해서  (0) 2003.08.24
택시  (0) 2003.07.0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