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괜찮은 일 본문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적, 스물여섯 일곱 살 때 사귀었던 여자는 무용을 전공했었다. 대체적으로 그녀와의 연애는 즐거웠던 걸로 기억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라든지, 나라든지, 또는 우리라든지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녀도 나도 아직 젊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즐거운 연애를 하기에 적합한 나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그녀는 나보다 세 살(어쩌면 네 살일지도) 정도 어렸는데, 그렇게 스물일곱, 스물넷의 나이란 1,2년 연애경험을 가지고 결혼을 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어린아이처럼 환상을 품지도 않고, 반대로 서로에 대해 늙은이처럼 너무 따지거나 재지도 않고,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게 남아있음에도 그렇게 때문에 ‘잘 하면’ 행복해질 것 같은. 아무도 나이를 잊고 살 수는 없다. 뻔한 얘기지만, 그렇다,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서른여섯이나 마흔일곱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나이 들어간다는 거고, 점점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물론 죽음이 더 빨리 찾아올 수도 있고, 더 느리게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어떤 특별한 의학적인 근거나 경험에 의해 확정되지 않는 한, 그러니까 일종의 시한부 선고가 내려지지 않는 한 현재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혼자 나이먹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와 나이가 같은 친구나 동료와 함께 나이 먹는다는 게 아니라, 나는 세상의 나이를 먹는 것이다. 서른여섯은 나의 나이가 아니라, 내가 서른여섯 나이에 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늙어서도 젊게 사는 법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반대로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부정해야만 행복해질 거라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또한 누구도 늙음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음까지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건 철학적이거나 의미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주 단순히 어떤 시간들에 대한 문제이다. 즉, 이미 지나간 시간이나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그리고 이 시간의 연장으로써 계속되는 시간에 관한 문제이다. 이를테면 고통의 시간. 결코 익숙해질 수 없고, 치워버릴 수도 없는 부러진 뼈와 같은 시간이다. 죽음으로써만 벗어날 수 있는 탈구의 시간. 누가 그것을 의미라는 상자에 담아 치워버릴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녀와 나는 약 1년의 연애 끝에 결국 헤어지게 된다. 나는 나중에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 있다고 했다. 아직 우리가 사귀던 시절, 무용학과였던 그녀는 졸업발표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남자친구라면 당연히 참석해야 할 발표회를 나는 가지 않았다. 다른 모든 동기 여자들이 남자친구로부터 꽃다발을 받을 때, 그녀는 한쪽 구석에 혼자 서 있어야 했다. 내가 그날 그녀의 발표회에 가지 못했던 데에는 변명이 있지만, 그것은 누구한테 말하기도 부끄러운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그날 괜찮다고 말했던 건, 앞으로 계속 내가 그녀 곁에 있을 것이므로 괜찮다는 뜻이었다고 했다.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그날의 일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거라고.
정말 괜찮은 걸까?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오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건 괜찮은 일이 아니다. 내일 당장 헤어질지 모르므로 오늘 모든 행복한 일들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내일 당장 헤어질 텐데, 오늘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생각의 틈새는 이런 게 아닐까? 내일 당장 헤어질 것 같아도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고, 영원히 살지 못하더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사람은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그렇게 -처럼 살 수는 없다. 그것은 그저 수사일 뿐이다. 그것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고 일단 믿는다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진실이 아니라도 믿는다는 식의 눈가림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고, 믿음은 약해져 간다. 믿음의 근거가 약해지는 게 아니라, 믿을 만한 일들이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 그 자체가 약해진다. 그저 지금 눈앞의 일들,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것들, 때로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에 대한 믿음 없는 낙관 같은 것들만 붙잡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더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때로 어떤 믿음들은 새로 생겨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괜찮은 걸까? 네가 내 옆에 앞으로도 계속 있을 테니까. 나는 어쩌면 그녀가 괜찮다고 말한 이유가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계속 내 옆에 있어줘요. 당신이 계속 내 옆에 있다면 이건 아주 작은 일이 될 거에요. 하지만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실제로는 어떤 일도 아주 큰 일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