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신파에 대해서 본문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일 중의 하나는, 흔히 말하는 ‘기브 엔 테이크’라는 개념이다. 주는 만큼 받는다. 또는 받는 만큼 준다. 이것은 20세기, 아니 21세기가 추구하는 ‘합리성’의 한 얼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합리성이라는 것이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20세기나 21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기원전, 아니 선사시대의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결코 이것은 인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적이라는 것과 이성적이라는 것은 사실 잘 따져봐야 할 문제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의 ‘이성적’이라는 개념은 인간적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동물적이다. 그러니까 동물의 세계야말로 ‘기브 엔 테이크’가 통용되는 합리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기브 엔 테이크’는 실제로 아무 의미도 없는 개념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기브 엔 테이크’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잘 생각해보라. 만일 내가 ‘주는 만큼만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왜 줘야 하는가? 주든 주지 않든 내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는가? 오히려 주는 행위를 통해서, 그 행위만큼의 손해를 나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나는 무언가를 잃기만 할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든, 또 나의 인생이든. 결코 ‘기브 엔 테이크’는 요컨대 거래라는 것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이 말은 무엇이냐하면, 실제로 ‘기브 엔 테이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혹은 이전의 어떤 순간에도 ‘기브 엔 테이크’라는 개념은 실제로 ‘실현’된 적이 없다. 이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약간의 혼란을 느끼지만, 이 혼란은 그저 고개를 약간 뒤로 들리고 혼잣말로 ‘들켰네’라고 말하면 금방 해결될 정도의 혼란이다. ‘기브 엔 테이크’는 항상 내가 너에게 또는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 잠시 가져다 쓰는 거짓 개념일 테니까. 자,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너한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그만큼을 돌려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그보다 더! 나는 받아야만 한다.
이것이 맞다. 하지만 이것이 맞는 만큼 반대의 의미도 맞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그만큼을 돌려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덜! 그보다 덜! 아니,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순수하게 너에게 주기만 하고 싶다. (너에게 순수하게 줌으로써 나는 그보다 더한 것을 무한히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신파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신파를 좀 더 인간적인 의미에서 바라봐야 하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히려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파야말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다.
자본주의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신파적이라는 데에 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수일의 눈물이 자본주의적이다. 진정한 희생자는 심순애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야말로 온전한 의미에서 정치적일 수 있다. / 2007.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