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자매들 본문

단상

자매들

물고기군 2008. 3. 11. 21:56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아니라고 한다면, 가령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또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최근에 내가 만났던 여자들은 계속 여자 형제 밖에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 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건 아니고,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열차가 지하를 빠져나와 지상 구간에 접어들었을 때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 그러네, 자매들이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몇 명중에 몇 명이 그랬는지를 밝힐 수는 없다. 어쩌면, 그건 거의 의미 없는 비율인지 모른다. 일종의 규정타석 미달이랄까? 표본자체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점은 확실한데, 나는 그녀들이, 또 그녀가 여자 형제 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여동생, 언니 밖에 없다는 사실에 끌렸던 것 같다. 적어도 오빠나 남동생이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때때로 그녀들의 얘기를 듣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언제까지 같은 침대를 썼다든지, 어떤 소꿉놀이를 했다든지, 언니가 자신을 보호해줬다든지, 여동생에게 무슨 선물을 했다든지. 분명 사이가 나쁜 경우도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냥 사이좋은 자매들의 이야기기 좋다.
이건 어쩌면 내가 남자고, 남자 형제 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린 시절 보았던 소설이나 영화의 이야기들, 작은 아씨들이라든지, 또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형제들의 이야기 때문일 수 있다. 어쨌든 나한테 갑자기 여동생이 있거나, 누나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일이 분명 나한테 자매가 있는 일일 테니까. 그건 내가 먼저 여자가 되어야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따지고 보자면 내가 남자고 남자 형제들 밖에 없다 하더라도,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남자 형제들밖에 없는 다른 남자의 삶에 대해서 다른 누구들보다 더 잘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인의 삶에 우리는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더 잘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아마도 반대일 거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넌 나를 이해 못해. 그래, 이해 못한다. 하지만 너 자신도 이해 못하지. 이야기는 끝이 없는 거다. 실제로도 그렇다. 가령 우리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 시간은 어쨌든 내 바깥에 있는 것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치료해 준다니. 내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힘들어서 견디기 어려운데, 내가 바랄 것이 ‘시간’ 뿐이라면.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다. 하물며 타인에 대해 내가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겠는가? 권한 이전에 어떤 이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다시 말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아마도.
만일 그저 누군가라면, 내가 아닌 누군가라고 한다면,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 혹은 바로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나를 속이려고 한다면 그건 언제나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어떤 사람들, 유명인들, 부자들, 가난뱅이들, 살인자들, 게이, 레즈비언, 아마도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대개는 변명에 불과하다. 때로 어떤 행동들은 이해할 수 없기는 하지만,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공감할 수는 있다. 행복하다든지 불행하다든지, 도망치고 싶다든지 고통받는다든지, 무섭다든지, 도움을 바란다든지. 내가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앞으로 살게 되지도 않을 테지만, 아마도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내 자신의 이해력이 누구보다도 크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이것이 세계인 거다. 정확히 말해서,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한의 세계인 거고,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한의 사람들인 거다. 모른다고 말한다면, 내가 그렇게 모르는 한의 세계인 거다. 이 말은 거꾸로 나는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는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내 자신을 끊임없이 어딘가에 내맡기거나, 어떤 일에 연루시키거나, 누군가의 삶에 전적으로 포함시키려 해도, 가장 작은 부분으로 남고 싶어도, 결코 완전히 이 세계로부터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오고 하얀 햇빛이 비추는 도시의 외곽지역을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자매들의 생각을 한다. 여자 아이 하나와 또 다른 여자 아이 하나가, 한 집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이전에도 물론 만나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결코 만날 일이 없는 여자친구의 자매들. 그리고 그녀 자신. 물론 나는 그녀들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녀를 사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나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하지만 내가 그 자매들을 생각하는 건, 때로 그들이 좀 달랐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결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삶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면 그들은, 그 자매들은, 사이좋고, 한 침대를 쓰기도 하고, 소꿉장난도 하는,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자매들의 세계에서. 내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내가 먼저 여자가 되지 않는 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상에 대해서  (0) 2008.07.14
우리는 임창정이 아니다.  (0) 2008.06.06
괜찮은 일  (0) 2008.02.28
신파에 대해서  (0) 2007.01.07
그녀의 뒤통수  (0) 2005.06.04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