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상상에 대해서 본문
흔히 말하기를 상상력은 무한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과 상상 중에 어떤 것이 더 클까? 즉각적으로 대답하자면 당연히 상상이 더 크다. 왜냐하면 상상은 무한하니까. 어쨌든 현실은 유한하니까. 그런데 나는 최근에 어떤 사례가 떠올랐다. 이 사례가 현실과 상상에 대한, 또 그 크기에 대한 정면의 대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이런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말이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섹스를 할 수 있다. 이건 비유적인 얘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 - 자위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실제의 섹스행위보다 자위행위의 경험이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순전한 상상 같은 거 말이다. 우리가 티브이나 매체를 통해 바라보고 상상하는 어떤 성적인 유사행위들, 상상들 말이다. 또는 과거의 여자라든지, 심지어는 아주 치명적인 대상에 대한 상상까지도. 그것을 통해서 일종의 유사 자위행위를 행할 수 있다. 이렇게 치면 분명 실제의 섹스행위보다 상상적인 자위행위가 더 많고, 크다고 볼 수 있다. 상상이 현실보다 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의 섹스행위를 통해서도 상상을 할 수 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상상을 하고 있지 않는가? 가령 우리는 구체적인 한 여자나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다른 여자나 남자를 상상할 수 있다. 그건 도덕이나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적인 문제다. 누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섹스가 무엇으로 구성되느냐의 문제다. 지금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만, 다른 여자를 상상하면서 섹스할 수 있다. 티브이나 매체에서 우리를 상상하게끔 유혹하는 섹스의 다른 대상 등을 상상할 수 있다. 그걸 흔히 섹스심볼이라든지, 섹스어필이라든지 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이것은 섹스에 있어서 예외적인 상상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상상이 필요하지 않은 섹스도 가능할 것이다. 그저 이 사람과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성적으로 고양되고 충만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엄밀한 의미에서 상상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일까?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또 그의 몸을 보면서, 거기에 아무 것도 끼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만일 실제 섹스행위에서도 어느 정도 상상이 개입한다고 한다면, 역시 상상이 현실보다 크다. 상상도 상상이고, 현실적인 것도 상상이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상상력이 무한하다는 말은 이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실이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무한히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결코 영원히 섹스할 수 없는 대상들까지도 상상 속에서 섹스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결코 상상 속에서 섹스할 수 없는 대상과 우리는 현실적으로 섹스할 수 있다면? 다르게 말하면 결코 상상하지도 않았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상상 속에서는 할 수 없는 대상과의 섹스. 예를 들자면 아주 못생긴 여자, 혹은 남자, 도저히 바라보고 있으면 섹스에 대한 어떤 열정도 불러일으켜지지 않는 상대.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편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왜 우리가 그런 상대와 섹스를 해야 한단 말인가? 결코 현실뿐만 아니라 상상에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왜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물음의 형식으로 이 질문을 쓰자마자 대답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 된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때 어쩌면 섹스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결코 상상 속에서도 하고 싶지 않았던 대상과의 섹스를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 행위를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그것이 결국 상상이 하는 일이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도 하고 싶지 않았던 대상과의 섹스를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꿔쳐야 한다. 상상해야 한다.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일종의 비현실로, 상상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매일 매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항상 패배하고 있으면서도.
자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상상과 현실 중에 어느 것이 더 클까?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대상과 현실적으로 섹스할 수 있으니까, 이 점에서는 분명 현실이 상상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무한한 상상을 벗어나는 유한한 현실의 사례. 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상상할 수 없는 대상이란 없다, 그러니까 아주 못생긴 대상과의 섹스도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닌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순진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으니까. 상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 대상과 섹스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그냥 할 수 없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대상을, 순전히 현실적인 대상을 다른 상상의 대상으로 바꿔쳐야만 그 행위를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다. 현실에서 하고 있는 일을 상상 속에서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우리가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가? 분명히 나는 그것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하고 있다. 상상할 뿐인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가? 그 사례는 무수히 많지 않은가? 이를테면 우리가 상상할 뿐인,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모든 섹스의 대상들, 그들이 현실적으로 섹스를 하고 있지 않는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 그 모든 일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는가? 섹스를 하기도 하고, 자살을 하기도 한다. 핵폭탄, 실제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지옥, 그것은 이 세계 어딘가에 있지 않은가? 마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국이라 부를 어떤 삶을, 그저 상상할 뿐인 어떤 삶을, 누군가는 진짜로 살고 있는 것처럼.
상상한 것들이 현실적이 될 수 있지만, 우리가 모든 현실을 상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상상하지 않았던, 상상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일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과연 현실보다 상상이 크다 말할 수 있을까?
결론은 간단하다. 상상은 현실보다 언제나 작은 것이다. 상상하지 마라. 우리가 결코 상상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라. 그 일들이 언제나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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