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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상상이 언제나 이긴다 -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 본문

단상

그래서 상상이 언제나 이긴다 -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

물고기군 2008. 8. 1. 16:13

사람들은 누군가 나쁜 선택을 했을 때, 그가 뭘 잘 몰라서 그랬다고 말한다. 이 말은 대개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맞는 건 아니다. 그리고 전부 맞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마다, 그 평가의 절반은 나 자신에게 향한다.

물론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가 두려워서 그랬다면, 여전히 뭔가를 잘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라고 의심해볼 수 있다. 마치 자연재해를 신의 뜻으로 여겼던 조상들처럼. 기우제를 지내거나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뭘 잘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왜 발생했는지를 아는 것이, 그 일에 대한 두려움의 전부를 없애주지는 못한다.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그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원인을 영원히 없애버릴 수 없다면. 게다가 우리가 뭘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 원인들을 끝없이 추적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마지막에 만나는 것은 ‘근본적인 무지’다. 근본적인 무지는 무엇인가? 이것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들이 있다. 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 무지는,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지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지는 그렇게 ‘어떤 존재’에 대한 부정과 같다. 무지는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지만,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실현된 적이 없다고 믿는 것과 같다.

무지를 이렇게 정의 내리고 나면,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얻게 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잘 알고 있지만, 근본적인 무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쁜 선택을 한다. 이때의 근본적인 무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무지이다. 자신이 선택의 바깥에 있다고 믿는 무지이다. 실제로 자신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는 무지이다. 반대로 자신이 무엇도 언제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무지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더해서 그들은 그 결과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다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자신들이 선택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실현되지 않음’이 근본적인 무지를 낳는다. 이것은 도박이나 사기의 경우로 쉽게 설명된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은,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게 속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속는 것은 ‘사기’ 그 자체다. 만약 누군가 돈 1억을 투자하면 한 달 뒤에 10억을 되돌려 받는다는 사기를 당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일이 불가능한가? 그 일이 단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던 일일까? 아니다. 그런 일은 실제로 존재한다. 돈 1억이 한 달 만에 10억이 된다. 그보다 더한 일도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부자란 존재들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어떤 것이 사기가 아니라, 실제로 모든 일이 사기다. 돈. 화폐.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모르는 걸까?

‘라운더스’라는 도박영화를 보면 만일 네가 테이블에 앉아 30분 내에 ‘봉’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네 자신이 봉이다, 라는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문제는 만일 이 세상이 테이블이라면, 누가 그 테이블에서 일어설 수 있겠는가 이다. 테이블을 벗어나는 것이 과연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선택이 될 수 없다. 아무도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될 뿐이다. 난간을 넘어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다.

‘실현되지 않음’이 낳는 근본적인 무지는, 그러니까 그 일이 언제나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로 존재하게 된다. 아무도 선택할 수 없지만, 모두가 선택의 결과가 된다는 말이 이것이다. 이때,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지만, 그리고 어쩌면 모두가 그렇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채 남아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진신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무지를 향해 있다. 지식은 이 근본적인 무지를 덮는 뚜껑일 분이다. 지식이야 말로 뭘 잘 모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만일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그 반대로, ‘잘 알고서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무언가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 알고서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잘 알아서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근본적인 무지와, 상상(이 말은 항상 핵심적인데)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상상이 이긴다. 왜냐하면 상상은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인데, 누구도 실현된 적이 없는 것, 심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에 대항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사실은, 상상은 그렇게 실현되지 않음으로, 항상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상상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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