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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우리는 임창정이 아니다. 본문

단상

우리는 임창정이 아니다.

물고기군 2008. 6. 6. 04:37

나는 배우 임창정을 좋아한다. 개인 임창정은 잘 모르겠다. 그가 출연한 영화중에는 괜찮은 것도 있고, 그저 그런 것도 있고, 왜 만들었는지 모를 영화도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영화에서조차 배우 임창정의 연기에는 뭔지 모를 울림이 있다. 그가 그만큼 연기를 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그건 잘한다 못한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임창정 본인조차 모를 ‘생득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령 ‘일번가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자.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일까? 관점에 따라 괜찮은 영화일 수도, 쓰레기 같은 영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현실을 반영한 영화일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을 감상적으로 어설프게 할리우드식으로 버무려 놓은 영화일 수도 있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놀라운 장면은 - 아니, 놀라운 대사는 이 부근에 있다. 장면이나 설정 자체는 구태의연하달 수도 있지만. 철거용역원들이 집들을 부수고 있고 아이들이 울고 있다. 임창정이 등장하고, 아이 중 하나가 그에게 저 사람들이 왜 우리 집을 부수느냐고 하소연한다. 그러자 임창정이 말한다. ‘울지마. 이 새끼야. 그러니까 니들이 맨날 가난한 거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대사였다. 물론 이 다음 대사는 ‘저 아저씨들이 헌집 헐고 새집 지어주려고 한다.’며 착한 거짓말 같은 좀 오버스런 대사가 나오긴 하지만.

앞선 대사가 뭘 의도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저 아저씨들이 왜 우리 집을 부숴요. 그건 네들이 가난하기 때문이야. 나는 이 대사가 아주 놀랍게 느껴진다. 그건 이 대사가 정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동시에 그것이 임창정이라는 배우의 입을 통해 말해지기 때문이다. ‘색즉시공’이나 기타 영화에서 보여지는 바보스럽고 불쌍하고, 그래서 자주 비겁하고 굴욕적이고, 또 때로는 비열한 이미지의 배우. 분명히 다르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또 이어진 대사처럼 우리들이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임창정은 아주 쉽고 간단하게 말한다. 네들이 가난해서, 우리가 가난해서. 우리가 가난뱅이이기 때문에. 누가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가난하지 않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겠지. 이를테면 영화 내내 가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그건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 물론 임창정은 그 마을의 주민이 아니지만 짐작할 수 있듯이 역시 가난뱅이인 한 등장인물이 우리가 가난뱅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말한다.

‘스카우트’라는 영화도 있다. 이 역시 임창정이 아니었다면, 영화가 도달한 어떤 지점까지 이르지 못했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여러 관점들이 있을 테고, 여러 평가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부근의 딱 한 장면만은 이론의 여지없이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건 먼 거리에서 임창정이 계엄군에게 붙들리는 장면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임창정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선동렬의 아버지와 통화하고 나온 후가 된다. 이 장면의 놀라운 점은 그것이 먼 거리에서 풀샷으로 보여진다는 점에 있는데, 주위가 어둡고 조명이 한 곳에서만 비추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의 얼굴은 잘 확인할 수 없다. 그저 정렬하고 있는 군인들이 있고 그 앞에서 혼자 매 맞는 사람이 있다. 별 다른 소리 - 잔혹한 매질소리도 극적인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끌고 간다. 그동안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고정되어 있다. 어쩌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효과 자체는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걸로 끝이다. 뒤에 에필로그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사실 여기서 끝났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임창정이 출연하지 않는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있다. 만일 영화가 진실만을 보여준다면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광주의 어느 곳,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임창정은 끌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해도 어쨌든 임창정은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살인의 추억’의 엘리트형사이면서 세종대왕인 김상경과 일지매인 이준기, 외과의사 봉달희 이요원과 국민배우 안성기가 나온다. 일단 배우들의 면면자체부터 화려하다. 임창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임창정이 나왔더라면 왠지 ‘화려한 휴가’보다는 ‘구질구질한 휴가’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도착한 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호텔 예약은 되어 있지 않고 지갑은 잊어버리고 여자는 화를 내며 돌아가 버린다. 물론 나는 배우들이나 배우들의 캐스팅에 대해 딴죽을 걸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영 어울리지 않는 캐스팅인데 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도 있지만, 그게 이 영화의 치명적인 부분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계속 ‘아니다’라고 중얼거려야 했다. 무엇보다 감독이나 작가가 드라마(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혹은 부족한 부분이 유독 이 영화에 잘 드러난다. 이것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작법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에 치명적인 약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아니다.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이 영화가 5.18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스카우트’가 더 멀리 나아갔다. 어쨌든 ‘스카우트’에는 임창정이 나오니까. 이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임창정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말만은 아니다.

‘화려한 휴가’의 첫장면은 택시기사인 김상경이 키 큰 가로수가 길 양옆으로 늘어선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시골길을 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분명 평화로울뿐더러,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름다운 가로수길이다. 이 동화같이 아름다운 마을에 군인들이 들이닥친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 마을만큼이나 아름다운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교회가 나오고, 하늘거리는 플레어스커트와 긴 생머리의 여자가 나오고, 똑똑하고 착할뿐더러 아름답기까지 한 미소년 고등학생이 나오고, 감초역할을 할 만한 코믹스럽고 구수한 아저씨들도 나오고, 근엄하면서 인정 많은 택시회사 사장도 나온다. 신부님, 착한 형,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칠 것 같은 선생님. 정말 많이도 나온다. 그래도 임창정은 안 나온다. 그리고 5월 18일이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역사적 사건과 시간순서에 충실해진다. 거기에 극적인 효과가 몇 가지 덧붙여질 뿐이다. 착한 미소년 동생의 죽음이라든지, 시민군이 된 퇴역군인과 계엄군이 된 정의로운 현역군인과의 만남이라든지, 순박한 택시기사 총각과 아름다운 생머리 간호사 처녀의 애틋한 사랑, 딸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하는 아버지. 나올 법한 모든 극적 효과를 위한 관계들이 등장한다. 5월 21일 낮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의 발포. 5월 22일 시민들 무장, 공수부대 퇴각. 그리고 마침내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계엄군 투입, 남아있던 시민군 대부분 사살. 영화는 이 부근에서 끝이 난다. 착한 형이자 택시기사인 김상경의 죽음과 이요원의 애절한 차량방송 목소리로. 아니, 에필로그적인 장면이 덧붙여진다. 김상경과 이요원 결혼식 환상 장면. (이런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나는 때로 원조가 어느 영화인지 궁금해진다.)

영화에는 정말로 많은 극적인 장면들이 나오는데 따져보면 실제 사건이 워낙 그러했기 때문에 영화가 그것에 압도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압도되어선 곤란한 일이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마지막 장면, 주인공 김상경의 죽음 장면이다. 이것을 영화 ‘스카우트’와 비교할 수 있다. 차이점은 여러 가지지만 어쨌든 ‘화려한 휴가’가 더 화려하다. 김상경의 절절한 대사도 있고, 얼굴 클로즈업도 있고, 슬로우 모션도 있다. 게다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도 화려하다. ‘스카우트’는 앞서 말했듯이 아무 것도 없다. 임창정은 반항하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있다 해도 그저 웅얼거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냥 공중전화 부스에서 끌려나와 개처럼 맞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갈 뿐이다.

아마도 ‘화려한 휴가’에 임창정이 나왔다면 그리고 그가 김상경과 똑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그는 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폭도는 총을 버려라. 예. 버렸어요. 그러니 죽이지 말아요. 5월 18일 날 계엄군들이 왜 자신들을 때리는지 아무도 모를 때, ‘일번가의 기적’의 그 아이처럼 누군가 임창정에게 왜 저들은 우리를 때릴까요? 라고 묻는다면 임창정은 우리가 폭도니까. 그래서 맨날 맞고 다니는 거야,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김상경의 마지막 대사는 ‘나는 폭도가 아니야.’였다. 그에 화답하듯이 이요원의 방송은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즉각적으로는 ‘우리가 폭도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주세요.’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폭도가 아니라,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그들이 그저 평범한 시민들이었음을 강변하고 있는 듯하다. 평범할 뿐만 아니라, 착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시민들. 똑똑하고 정의롭고 인정 많고 의리 있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래, 그들은 시민들이었어. 당시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언론들이 매도했던 폭도가 아니었어. 그들이 무장하고 저항했던 외양은 마치 국가에 대항하는 폭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원인이 국가의 무법적인 폭력에 있으니 그것은 당연한 자위권의 발동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린다면 5.18은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한 국가권력의 만행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사실이니까, 단지 그렇다고 말한다면, 단지 그뿐이라면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오히려 빠트리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사실을 그대로 그렇다고 말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10일에야 ‘그들은 폭도가 아니었다.’고 거리에서 큰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그 지점까지 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20년이 지났는데, 단지 거기까지 가는 걸로 충분한가?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빠트린 것은 무엇일까? 아니, 5.18의 광주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야, 그들은 무고한 시민이야, 전두환 정권은 살인마였어, 라고 말할 때,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민 대 계엄군. 국민 대 국가. 피해자와 가해자. 범인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 진실은 밝혀진다. 역사의 심판. 여기에 빠져있는 게 무엇인가? 영화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A와 B가 있다. A가 B를 죽였다. 그리고 A는 B가 죽을 만한 짓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거짓으로 밝혀진다. A는 죄의 대가를 받는다. 이것이 5.18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5.18의 광주시민들은 단순히 계엄군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 피해자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가 빠트린 것은 이 지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무고한 시민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영화가 놓치게 된 것은,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다는 역사적 사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선택은 무고한 시민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선택을 통해 그들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게 된다.
다소 위험한 논의일 테지만 5월 21일 공수부대의 발포 이후, 그들은 무장을 하게 된다. 이미 이 지점에서 그들은 더 이상 무력한 피해자, 무고한 시민이길 그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 그 권력이 비록 정의가 아니었을지라도 - ‘폭도’가 된다. 누군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해서, 그 자신 스스로가 되갚아 그 살인자를 죽인다면 이 또한 무법적인 행위 - 살인이 된다. 살인자가 된다. 물론 여기서 곤란한 점은, 살인자가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개인이거나 단체가 아니라, 어쩌면 법 자체라 할 수 있는 국가권력이라는 점에 있다.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다. 이를테면 국민이란 무엇인가? 국민은 권리이면서 의무이다. 내가 국민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규칙 속에 들어있음을 말한다. 그 규칙이 옳은가, 그른가라는 문제는 내가 국민이라는 사실과 무관하다. 그 규칙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 거꾸로 말할 수도 있겠지. 국가 또한 권리이면서 의무가 아니겠는가? 국민을 살해하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지 않겠는가?

5월 22일, 무장한 시민군에 의해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퇴각했을 때, 광주에는 더 이상 국가권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권력이 그곳에 없는 이상, 그들 또한 더 이상 국민이 아니게 된다. 광주는 반국가권력이거나 무국가권력의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이 어쩌면 공동체없는 공동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원-공동체의 형상을 보여주지는 않는가? 왜냐하면 역사적 기록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국가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그들은 오히려 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결코 무법지대가 아니었다. 이것이 영화가 놓치고 있는 첫 번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는 어쩌면 그들 외부에 여전히 그들을 위협하는 국가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중간적인 - 임시적인 공백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다음에 그들은 또 다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지점으로 내몰린다. 수습위원회와 계엄군과의 협상은 결렬된다. 계엄군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원한다. 실제로 계엄군은 그들의 어떠한 요구도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협상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패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패배한 적에게 왜 무언가를 내줘야 하겠는가? 시민군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들이 이미 패배해 있었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다시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총을 바닥에 내려놓는 것으로, 전남도청에서 나오는 것으로, 5월 18일 이전, 원래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들은 다시 ‘시민’이 되고, 다시 ‘시민’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원래 그들이 있던 곳으로 가는 거 아닌가? 이 부근에서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갈등의 양상을 얘기하고 있다. 매파와 비둘기파.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 영화는 이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 선택을 보여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광주시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고한 시민으로 남아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떠나는 자와 남는 자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곳을 떠난다는 게 무엇인지, 남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가슴 아픈 이별 장면 정도로 그친다. 왜냐하면 사실 아무도 그곳에 남아있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들이 전남도청에서 지킬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전남도청은 ‘시민’들의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면 자신들의 집이나 가족, 여자가 아니었겠는가? 기록에 의하면 26일 밤 150여명 정도가 도청에 남았다고 한다.

5월 18일 계엄군은 무자비하게 광주시민들을 폭행한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시민들이었다. 5월 21일 총을 맞은 것도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5월 22일,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무장한 사람들은 시민이었을까, 폭도였을까? 폭도였다 하더라도 그들을 폭도로 만든 것은 폭압적인 국가권력이었다. 그들이 폭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권력이 그들을 내리 눌렀기 때문에 그것에 항거해서 일어선 것이다. 그들이 폭도였다면 그들이 국가권력에 무력으로(불법적으로) 대항했기 때문이고, 그들이 폭도가 아니라면 그들이 대항한 국가권력이 부당한 것(불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권력과 반권력, 법과 불법의 사이클 속에 있다. 이제 그들의 마지막 선택, 5월 26일 전남도청에 남기로 한 선택은 어디에 있을까? 권력인가, 반권력인가? 법인가 불법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패배 그 자체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패배한 싸움에서 패배를 선택하는 것으로 그들은 살 수 있었다. 도청을 떠나는 것이 그것이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자신들이 폭도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아있는 것이 자신들이 시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을까? 남아있는 것으로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라고 항변하고자 했던 걸까?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 집에 있었던 사람들이 시민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요원은 방송을 통해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광주시민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그날 밤 도청을 떠나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한 여성은 인터뷰에서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느꼈던 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무 무서웠어요. 총이 무서웠던 게 아니라 시체들이 무서웠어요. 뚜껑이 덮여 있지 않는 관들이 있었는데 얼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 때문에, 그 옆을 지나온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얼굴이 없는 시체들. 죽었으나 죽음을 확인할 수 없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몸뚱이들.
패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들은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살아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패배보다 더 가혹하고, 죽음보다 더 비참하다. 패배했으나 패배하지 못하고,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것. 살아있는 시체가 되는 것. 5월 26일 밤, 도청에 남은 150여명의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그것이다.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것, 그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 당신이 틀렸고 내가 맞았다고 말하는 것, 이러한 것은 언제나 도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반도덕적이 될 수도 있다.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권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누가 옳은가? 무엇이 더 공중에게 이득이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 항상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고 또 그렇다.

‘스카우트’의 임창정은 폭도가 아니다. 심지어 임창정은 광주 시민도 아니다. 임창정은 그렇게 말한다. 나는 폭도가 아니에요. 나는 광주시민이 아니에요. 그리고 결국 풀려난다. 그런데 그는 다시 돌아온다. 물론 이 돌아옴 자체는 다분히 이기적인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구출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이 표면적인 이유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는 다시 폭도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 어느 한 순간의 자신을 '반복'하는 것처럼. 그는 경찰청을 습격한다. 그리고 여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놀라운 장면은, 앞선 말했던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그 골목은 이 다음에 나온다. 그는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먼 거리에서 바라보여진다. 그는 그저 계엄군에 의해 개처럼 끌려갈 뿐이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목숨을 걸고 구출한 그의 여자는 몇 십 년이 지난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자식들을 낳고 잘 살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이 광주에 내려왔던 애초의 목적, 선동렬도 잃고, 여자도 잃고, 심지어 그 자신의 승리조차, 동시에 자신의 죽음조차 잃어버린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의 김상경은 클로즈업 된다. 그의 얼굴은 화면 가득히 떠오른다. 폭도는 총을 버려라. 하지만 김상경은 총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폭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총을 버릴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나는 ‘무고한 시민’이다. 영화의 아이러니는 이 말과 행동의 불일치에 있다. 무고한 시민이라면서 왜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가? 무고한 시민이라면 총을 버리는 게 맞고, 총을 쏜 이상 그는 더 이상 무고한 시민이 아니다. 김상경은 여전히 그 악순환의 내부에 있다. 그의 논리는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폭도가 되는 것이니, 죽음으로써 시민이 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는 자신의 명예로운 죽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는 끝까지 무고한 시민으로 남아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름을 얻는다. 잊지 말아줬으면 싶은, 아니 잊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름을 얻는다.
임창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앞서 임창정이라면 총을 버렸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가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면, 어쩌면 그는 이렇게 외쳤을지 모른다. ‘내가 폭도다.  폭도니까 이렇게 죽는 거다. 폭도니까 맨날 이렇게 죽는 거다. 죽었는데 또 죽고, 또 죽는 거다.’

최근 뉴스 중에 인도에서 일어난 하층계급의 시위 뉴스가 있었다. 그들의 시위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계급을 한 단계 더 낮춰 최하층계급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최하층계급이 받는 혜택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다. 한 페이지의 짧은 기사에 불과하므로 정확한 진상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어쨌든 인도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권력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 권력을, 그 권력 중 일부를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 권력에 대항하는 다른 권력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 권력을 향해 그 권력은 원래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선택과 요구가 잘못되었거나 가치 없다고 말할 의도는 없다. 최하층 계급이 되고 싶다든지 하는 게 절실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주장처럼 이것은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다른 권력이 되고, 권력 중 일부를 나누어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이 원래 내 것이었음을 인정받을 때, 적어도 그렇게 경험했을 때. 그들은 돌아갈 테고, 돌아갈 곳이 있다. 집으로, 원래 그들이 있던 곳으로. 불만족스런 시민이었다가 만족하는 시민으로. 그렇게 해서 세상은 좀 더 나아진 걸까? 적어도 그들 자신에게는 좀 더 나아진 건지도 모른다.
자, 이제 여기서 빠져있는 것은 무엇일까?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폭도’다. 모두가 무고한 시민이니까 그곳에는 ‘폭도’가 없다. 시민으로 나와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다시 시민으로 돌아간다. 폭도는 어디에 있는가? 폭도는 없는 것일까? 국가권력이 폭도일까? 경찰이 폭도일까? 아니지. 시민은 국가를 상대할 뿐 폭도를 상대하지 않는다. 폭도는 배제되어 있다. 국가 또한 마찬가지다. 폭도는 국민이 아니므로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그들 누구도 ‘처음부터’ 폭도가 아닌데, 폭도가 있다는 것이다. 얘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너희 폭도지?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폭도 같은데? 너희들 주장은 순수하지 않아. 순수한 시민들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지. 아니, 우리는 순수한 시민이야. 우리의 요구는 불순하지 않아.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폭도는 ‘저기’에 있어. (어디? 광주에?, 전남도청에?) 아니, 잘 구분할 수 없는 걸. 너희들이 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봐. 너희 중에 폭도를 추려내. 너희가 폭도가 아니라 순수한 시민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너희들은 주장할 수 있어.
또 얘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일이 이렇게 된 건 폭도가 있기 때문이야. 폭도 때문에 순수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어. 폭도들이 너희들의 것, 너희들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있는 거야. 우리가 힘을 합쳐 폭도를 쫓아내야해. 너희 시민들에게는 그런 힘이 있어. 권력이 있지.
물론 실제 얘기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 사이에, 국가와 국민, 권력과 반권력 사이에 ‘폭도’가 있다는 것이고,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 있었고 나중에는 없다. 동시에 그것은 처음에는 없고 나중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니지만, 우리들 중 하나다. 놀랍게도 시민들 모두가 폭도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다시 보면 물론 그들은 순수한 시민이다. 하지만 그들이 순수한 시민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러한 노력의 가장 가장자리에서 가장 폭도와 가깝게 보인다. 나는 폭도가 아니야, 라고 외치는 그들의 얼굴이 가까이 비치면 비칠수록 그들은 순수한 - 무고한 시민처럼 보이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을수록 폭도처럼 보인다.
폭도는 마치,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순간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순수한 시민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빠져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리가 폭도야.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두가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우리는 순수한 시민이야 라고 주장할 때, 이 주장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면서 이 주장에 의해 배제되어 있는 주장. 우리는 폭도야 라는 주장이 바로 온전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 하지만 정치적인 행위로써의 우리가 폭도야 라는 이 주장은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를 1980년 5월 26일 밤으로 데려간다. 얼굴 없는 시체들이 있는 곳, 2만 5천 계엄군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전남도청의 어느 창문 곁으로 데려간다. 그들에게는 한손바닥으로 다 쥘 수 있는 몇 발의 칼빈소총 탄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곳을 선택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폭도로 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죽을 수 없는 죽음이 바로 5월의 광주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무고한 시민이 아니고, 국민이 아니다. 그들이 바로 국가 자체였고, 그들이 1980년 5월의 대한민국이었다.

5. 18에 대한 다큐멘터리 중 하나에는 18년째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그는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시민군 중 한 사람이다.
‘망월동에 다 묻혀있다고.’
‘아따, 내가 아는데 그래 … 사람은 안 죽고 묘가 아니라 다 공원, 다 … 공원.’
‘왜 그걸 안 믿을라고 해요?. 형 앞에서 ……오빠 앞에서 총 맞고 다 숨 거뒀잖아요.’
‘그래도 성경에 나와 …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성경에 보니까 죽었다 하지 마라. 잠잔다, 잠잔다 하라 해요. 이렇게 나와요. 주 하나님 말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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