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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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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포털의 헤드라인 뉴스를 읽고

물고기군 2009. 3. 6. 09:56

특별히 시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 아니, 관심이 없는데, 노트북을 켜면 또 아무 생각없이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읽고는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뉴스란 게 확실히 뉴스여서 뭐가 맞다든지 틀리다든지, 또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일종의 ‘문제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럼 또 나도 그런 걸 생각하게 된다. 대개 뉴스란 게 그렇듯 - 그러니까 또 뉴스란 게 확실히 뉴스여서 - 뭐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보다 잘못 되고 있다는 내용이 많다. 가령 오늘의 (포털) 헤드라인 뉴스는, 자세한 사건의 전개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촛불집회 재판에서 대법관이 일종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개입을 했다는 내용이다.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권력의 시녀로”

“신뢰에 금간 대법원…사법파동 또 오나”

“대법원장·헌재 거론 ‘촛불 유죄’ 재촉”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나? 물론 문제가 된다. 이래선 안되는 거다. 잘못됐다. 그래서 우리는 - 아니, 나는 이 문제가 잘못됐으므로 뭔가 잘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란다. 아마도 이 뉴스를 전하는 쪽도, 또 전달받는 쪽도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그건 분명한 잘못이고, 누군가 벌을 받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할 거라 예상한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뉴스가 전하는 내용을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또 대개 바람직하다. 흔히 영어로 ‘팩트’라는 부분, 그러니까 아무 의견도 더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사실이란 부분도, 그것이 결국 하나의 의미있는 말이 된다면, 그래서 그것을 누군가 전하고 전달받는 형태가 된다면, 거기에는 항상 사실 ‘이상’의 것이 포함된다. 설혹 거기에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스스로 믿는다해도. (아무런 의도가 없다면, 말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고’, 또 어떤 면에서는 일이 그렇게 진행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믿는다. 일종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 또는 어떤 기관이, 또 어떤 (객관적인) 위원회가 사건의 전모를 밝혀주길 기대한다. (그래서 위의 사건이 다른 것보다 더 큰 중대성을 가지기도 한다. ‘사법부’란 게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한편으로 그 중대성을 그렇게까지 과장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사법부’든 무엇이든, 어느 것이나 결국 ‘시대’에 잡혀있는 존재여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하지 않은가? 대체 사법부가 무엇을 밝혀낼 수 있겠는가? 가령 용산참사같은 사건들. 그 일의 전모는 이제 모두 밝혀졌는가? 그래서 또 어떤 사람들은 설혹 지금 사건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지 않는다해도, 시간을 초월하는 일종의 역사라는 객관성이 ‘최종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 또 언젠가는 최종적인 진실에 이르게 될 거라는 생각.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물론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성은 어떤 면에서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실제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가? 글쎄, 그렇게 보자면, 이건 문제가 안될지도 모른다. 종교적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면, 문제 자체가 이미 사태의 핵심을 이루는 형식이 되니까 말이다. 문제를 해결하면(그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거기에는 아무 내용이 없어지게 된다. 내용이 없어지는 걸, 해결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는 ‘해결’이라는 내용조차도 없으니까.

그런데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생각하겠는가? 얼마나? 내가 보기에는 거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위의 헤드라인과 기사를 읽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실 나도 뭐 별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 말은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생각한다는 뜻이다. 또 반대로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한들’, 또 거기에 무슨 중대성이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런 걸 냉소주의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게 문제가 되나? 물론 냉소주의는 문제가 된다. 냉소주의가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것이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아주 많은 걸 생산한다. 차갑게 웃음짓는 것만큼 많은 걸 생산하는 다른 표정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위의 기사를 읽고 실제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은 비록 이 글의 마지막에 위치하게 되지만, 결코 최종적인 생각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생각이 첫 번째 생각이다. 그건, 위의 기사를 읽고,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법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게 잘 하는 거고, 그게 정의다. 마땅히 대법원장이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인가? 이것이 예외적인, 또 어떤 의미에서는 병적인 생각인가? 하지만 나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믿고 싶어진다.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더 밝혀져야 할 진실도 없고, 바꿔야 할 잘못도 없다. 냉소조차도 없다. 드러난 것이 전부고, 그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마땅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가? 얼마나? 나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이 세상에 문제가 있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그걸 문제라는 것으로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아직, 또는 여기서는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미뤄두는 것과 같다. 냉소주의는 여기서 발생한다. 냉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있지 않다. 지금, 이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자는 적극적인 태도에 있지 않다. 냉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그것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생각이 문제가 되는가?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뉴스조차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전혀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위의 기사를 읽고,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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