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내 편 본문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얘기다. 기억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어떻게 지금껏 그 일을 기억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거나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대개 그러한 공터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낮에는 비어있다. 무슨 일인가로 나는 누군가와 말싸움을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또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추측해보건대, 그건 대단한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호전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항상 움츠려있고, 소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기억이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 수 있는. 어쨌든 그 싸움에 대해 내 기억이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그 말싸움의 측면에서 불쑥 끼어든다. 즉, 누군가 – 역시 이 누군가도 나는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나와 꽤 친하게 지냈던 녀석이라는 느낌이 든다 – 갑자기 끼어들어 이런 말을 내게 한다. ‘넌 욕을 너무 많이 해.’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그 말에 동조한다. ‘그래. 그래.’ 그런가? 나는 그 시절 욕을 많이 하는 거친 녀석이었나. 사실은 이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내 심정과 똑같이 깜짝 놀라고 당황했으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어떤 종류의 욕을 섞어서 말하기 좋아했지만 그건 일종의 말하기 방식에 불과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경험하듯이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이 동향친구와 사투리로 대화할 때 자연스럽게 거기에 따라붙는 욕처럼. 물론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다른 친구들은 그걸 불편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과연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일을 거침없이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나,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누구라도 내게 진작에 주의를 줬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나는 소심쟁이였지, 결코 대장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말에 욕을 섞기 좋아한 것도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나는 애초에 말싸움을 했던 상대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그 이유도 상관이 없어졌고, 그래서 결국 누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상관이 없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나쁜 아이가 되어버렸으니까. 이 다음도 재밌다. 결국 나는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더 이상 그들의 놀이에 낄 수가 없었다. 다른 애들이 나보고 가라고 했는지, 내 스스로 괜한 오기를 부리며 씩씩거리며 돌아섰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아주 의기소침해져서 슬며시 빠져나왔을 수도 있다. 그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혼자 돌아가는 길.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그 자리를 떠났는가와 상관없이 매우 분명한 사실은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내 편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본능적으로 누구와 편을 먹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내가 편들만큼 좋은 편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 좋은 편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순히 ‘편듬’ 자체를 싫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설명할 때도 있다. 그게 왠지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고독한 아웃사이더 같은.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내가 얼마나 간절히 내 편을 원하는지 안다. 내가 어딘가에 속하기를, 그래서 단순히 그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내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고,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길 바라는지.
어떤 편,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좋게 말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물론 때로 그렇게 말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 말만으로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도 쉽다. 이를테면 아프리키나 또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느 나라에 가서 그 비참한 삶을 보고, 껴안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 같은 거. 이를테면 어떤 부당한 일이나, 불의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는 거. 그들의 편에 서는 거. 나는 그들이 어떤 정당한 편이나 좋은 편에 속해있는 사람들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나는 그들이 마치 누구의 편도 아닌 것처럼, 동시에 마치 이 세상 모두의 편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느낀다. 그것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아주 불편하게 한다. 그러한 태도야말로 가장 무서운 허위에 감싸여 있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그들이 거짓을 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이, 또 그러한 일들이 이전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일종의 어떤 거대한 음모를 배경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어뗜 면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의 편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편이라고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이렇게 말로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그냥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한다.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자면 그 불가능성 위에 서 있고자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이 ‘불가능한 위치’를 일종의 어떤 ‘있음’으로, ‘있는 위치’로 바꾸는 마법 같은, 그러나 아주 흔히 이뤄지는 작용을 본다. 대담하게 말하자면 그 마법 같은 일은, 이미 우리 모두가 행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마법은 지금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인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같은. 다르게 말하면 우리들 모두는 ‘어떤 현실적인 편’에 속하기 위해, 그 이전에, 이미 ‘불가능한 편’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또 어떤 그들이, 그 ‘불가능한 편’에 속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들은 단지 본래의 그들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한 어떤 위치’를 가르는 아주 미묘한 틈새에 있다. 단지 우리가 어느 ‘현실적인 편’에, 이를테면 보수나 진보에, 좌익이나 우익에, 지배층과 피지배층, 서민과 중산층, 남성이나 여성의 편에 속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또 그 편에 속해있다면, 그건 그냥 바람직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옳은 편도, 나쁜 편도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행하는 편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나쁜 것은,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앞서 말했듯이 ‘불가능한 편’에 속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만일 진정한 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편도 아니길 원하는 사람, 그러면서 모두의 편이길 바라는.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 진실로 그 편에 속해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두고 인간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원히 인간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사람들을 티브이나 신문에서 만난다. 우리는 그들은 증오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또한 진정한 선이 있다면 그것도 그 편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선은 본질적으로 불편부당한 것이니까. 선은 어느 편에도 속해있지 않아야 하니까. 그렇게 치자면 진정한 악도, 선도 어쨌든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건 내가 국민학교 때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 중의 하나는 아직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 모두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아이러브 스쿨’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동창 모임을 가졌는데, 꽤나 많이 변해있어서 놀랐었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음에 또 보자고 했을 테지만, 내가 피했는지 아니면 그 친구가 연락을 안했는지, 그 후로 본 기억은 없다. 돌이켜보면 그 친구야말로 내 국민학교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할 만한 친구였다. 물론 그일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냥 시간이 많이 흘렀을 뿐이고, 다른 친구도 많이 생겼고, 다른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들은 서로 다른 편이 되었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이편이었다가, 저편이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게도 편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래된 이야기같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이제 나는 그때 내편이었다고 느꼈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이 역시 자연스런 일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다른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진다. 아니, 어쩌면 그때처럼, 내가 나도 모르게 욕을 섞으며 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넌 욕을 너무 많이 해.’라고 말하자, 모두들 ‘그래, 그래.’라고 동의했는지도. 그러고보면 항상 그 비슷한 말을 들으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고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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