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도장 본문
옛 여자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듣게 된 것이 아니라 보게 된 것이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게 아니라 실제 그녀 자신의 문장을 통해서지만. 그것은 내가 아는 누군가의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의례적인 안부 인사 같은 것이었다. 물론 내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짧은 문장을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어머니와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며칠 뒤, 그 홈페이지의 주인, 선생님을 만났다. 농담처럼 그녀의 얘기를 꺼내본다. 그녀는 여전히 말랐다고 한다. 나는 잠시 나와 함께 있던 시절에 그녀의 몸을 떠올려 본다.
인감도장을 팠다. 용도가 용도인 만큼 어머니께서는 좋은 도장을 파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뭐가 좋은지 알 도리가 없다. 전철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어떤 문구사의 도장집이었다. 인감도장을 판다고 하니까 벽조목 도장을 권해준다. 벽조목? 벼락 맞은 대추나무입니다. 운이 좋아진다고 하죠. 나는 그걸로 하겠다고 했다. 한 시간 뒤에 오라고 한다. 근데 설마 진짜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아니겠지요? 이 말에 도장집 주인은 웃었고, 나도 곧 따라 웃고 말았다.
여자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나는 그녀에게 다 기억난다고 말했다.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하고 말했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다. 다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은 더욱 그렇다. 어느 날 나는 그녀와 스케이트장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시험 삼아, 그날 그녀가 입었던 옷이며, 나눴던 대화의 내용이며, 어떻게 약속을 정하고, 어떻게 만났는지 등등, 그날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기억나는 것도 있고,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스케이트장을 나와서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나와서 백화점 앞에 있던 노천카페에서 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무리 애써 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이 100일 선물인지, 아니면 크리스마스 선물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여자는 내게 ‘도장’을 선물했다.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걸 주고 싶었다고 한다. 과연 ‘도장’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감도장만 아니라 그냥 편하게 쓸 수 있는 목도장도 필요하다고 해서, 문득 그녀가 내게 선물했던 그 도장이 떠올랐다. 아직도 있을까, 싶었는데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과연, 그녀의 바람대로, 도장이라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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