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꿈에 대해서 본문
'지금의 어린이들이 자라서 결국 될 수 있는 건 보잘 것 없는 어른일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수많은 나쁜 일들 중에, 그래도 좋은 게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일본 재패니메이션에 대한 다큐멘터리 중,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감탄하고 말았다.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인터뷰는 1996년이나 97년의 것으로, 그가 아직 ‘원령공주’를 만들기 전의 일이다. 나는 특히 첫 번째 문장이 맘에 든다. ‘지금의 어린이들이 자라서 결국 될 수 있는 건 보잘 것 없는 어른일 뿐이다.’ 이런 터프함과 냉정함, 그리고 자포자기적인 심정이 좋다. 비록 아무도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에게,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어른일 뿐이오, 라고 말하지 못할 테지만, 그래서 그 말은 이미 성취한 사람의 오만과 여유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누가 봐도 근사한 인생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보잘 것 없는 어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정말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여긴다고 믿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고, 여전히 꿈같은 만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화들은, 그의 소박한 바람대로, 우리가 겪고 있는 끔직한 삶 속에도, 여전히 좋은 일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내일 모레면 (정확히 말해서 내일 모레 글피 후면) 서른한 살이 되는 내가, 새삼스레 ‘꿈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어쩐지 낯간지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직하게 고백하면, 이 ‘꿈에 대해서’라는 단상은 지금 바로 이 순간 문득 떠오른 제목이 아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 정확한 날짜를 유추해낼 수도 있다. 나는 그날 누군가에게 내가 어린 시절 꿈꾸었던 삶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과연 내 자신이 지금껏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이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몇 년 전에 쓴 ‘한번이라도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물어봤어?’라는 나의 소설에서 어렴풋이 나와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탐험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열렬히 바랐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껏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꿈꾸어본 적이 없다. 그토록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꿈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그랬을까? 단지 잊어버린 것뿐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날 내가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은 사뭇 구체적인 것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나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소설을 읽고, 주인공 하이디의 삶을 동경했다. 하이디의 2층 다락방, 짚을 깐 침대며 하늘을 향해 나 있는 창 등을 동경했다. 그곳에서 밤이면 별을 보고, 아침이면 첫 햇살에 눈을 뜨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하이디의 친구 피터의 삶도 좋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양떼를 몰고 산으로 올라간다. 풀이 좋은 적당한 산 어귀에 도달하면 양떼를 방목하고, 나무 그늘에 누워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다시 양떼를 불러보아 산을 내려간다. 이것도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것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 같은 소설에 불과하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알프스에서 양을 키우는 사람들(대체 아직도 양을 키우기라도 하나?)의 삶도 이와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이곳은 알프스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바랐던 것은, 조금은 더 현실적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위해 내가 구체적인 계획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전망이 좋은 방을 하나 가지고 싶었다. 그것은 그다지 넓은 방이 아니어도 된다. 내 책상과 침대와 옷장 정도가 들어갈 정도의 방. 나는 그곳에서 혼자 책을 읽고, 또 혼자 뭔가를 쓴다. 음악을 들으며 전망이 좋은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이 두 가지의 꿈을 통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어떤 것이든 내가 꿈꾸는 장소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나를 조금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외로운 걸 잘 못 견디는 타입의 인간이라고 스스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외로운 걸 싫어한다. 그런 내가 어째서 나 혼자 있는 공간만을 꿈꾸었던 걸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의 생각은, 어쩌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꿈꾸는 것’과 ‘외로움’과는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외로운 게 싫기 때문에’ 누군가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코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마음, 즉 그 사람과 삶을 공유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이다. 이기적인 것이다. 그 이기적임으로 인해, 나는 지금껏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자신이 굉장히 소박한(‘전망 좋은 방’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 과연 소박한 건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녀석이 문득, 자기가 어느 재벌 집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출생의 비밀 같은 얘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과연 그런 식의 꿈도 가능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인데, 당시 그 친구네 집은 상당히 잘 사는 집이었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동차(아반떼)를 입학선물로 사준 집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친구네 집 정도는 아니라 해도, 우리 집도 사정은 비슷했다. (지금은 조금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대학을 다니면서 등록금 걱정 한 번 안했던 나는 정말 유복한 인간이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우리 둘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재벌 집 아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허황된 바람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만일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나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재벌 집 아들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두고, 너는 속물이다, 라고 손가락질 하면 분명 조금은 기분이 상하겠지만,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속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기준 같은 게 모호하긴 해도. 가령 예를 들어, 최신형의 핸드폰이라든지, 고급 노트북, 더 크게는 외제 차 같은 걸 보면, 사고 싶다.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론 막상 살 수 있는 능력이 되었을 때, 과연 사게 될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뭐라 해도, 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사한 삶’(꿈)이란 어쩔 수 없이 ‘부자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부자가 되는 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에 내가 알던 친구는, 자신은 울게 되도 ‘캐딜락’ 안에서 울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나는 그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고, 알게 되었을 때는 비웃었지만, 과연 그것을 비웃을만한 자격이 내게 있는지 반문해봤어야 했다. 어쩔 수 없다. 나도 아주 간절히 부자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부자가 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젊었을 시절 노력했어야 한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돈을 벌 수 있는 학과를 선택해야 했고, 돈을 벌 수 있는 공부를 했어야 한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해서,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부자가 되고 싶긴 했지만, 미래의 내가 부자가 되는 것보다, 지금 현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좋았다. 미래의 일 따위는 잘 생각하지 않았다. 또 워낙 게으르기도 했다. 분명 이것은 내 자신이 돈 때문에 고생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누군가는 나를 손가락질 하며, 너 같은 인간은 가난을 몰라, 돈의 무서움을 몰라, 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예전에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정말로 나는 한 번이라도 가난해봤어야 한다고,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인생을 알게 되고,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이것도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비난 또한 변명에 불과하다. 모든 건 변명에 불과하다. 내가 만일 지금처럼 유복한 인간이 아니었다 해도, 그렇다, 나는 여전히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도 분명 근사한 일이지만, 내게는 더 근사한 게 있다고 말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고생스런 삶을 살 테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나쁜 일들 중에서, 그래도 좋은 게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것을 문장으로 쓰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자신이 결국 ‘보잘 것 없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것이다. 내가 무엇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볼 것이다.
물론 나도 후회를 한다.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때로 아주 마음깊이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른한 살이라는 나이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든다. 대체 너는 지금껏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는가? 그래서 지금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답하기 어렵다. 고백컨대, 가족이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라는 인간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타이틀로 불려지고 있지만, 실제로 꼭 소설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지금껏 뭔가를 지속적으로 강렬하게 원했던 적이 없다. 소설가라는 직업, 꿈은 분명 어느 순간, 나를 붙잡았지만, 그렇게 꽉 붙잡은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을 선택해야 할 때, 아무런 주저 없이 국문과를 선택했지만 국문과에 들어가서 내가 열심히 했던 것은 소설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소설은 썼다. 그것은 쓰고 싶어서였지, 그렇게 해서 내가 미래의 근사한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러다 2학년이 되면서 속해있던 국문과 소설창작학회에서 탈퇴했다.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별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설에서 손을 뗐다고 생각했다. 아, 이제 나는 다른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로부터 4년 뒤(군대 2년을 포함해서)인, 4학년 때 다시 이전의 소설학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왜 그랬을까? 당연하게도 그 4년 동안에도 나는 역시 ‘쓰고 싶어서’ 소설을 써왔기 때문이다. 그 소설들은 결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소설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홈페이지에 다 공개되었지만, 그때의 심정은 그랬다.) 나 자신만을 위한 문장이었다. 내가 무엇을 바라든, 어떤 삶을 추구하든, 나란 인간은 문장을 쓰는 일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이왕 쓰게 된다면 잘 쓰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뿐인 것이 여기까지 왔다. 서른한 살의 소설가 지망생. 돌아보면 참 한심한 인생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낙천적인 인간인지라, 그 한심함은 나를 오랫동안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분명 한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자신이 싫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살아오면서 내 앞에도 여러 갈림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아주 깊이 고민을 하든, 아니면 즉흥적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든, 나는 어떤 길들을 선택해왔다. 그때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그녀와 결혼했더라면? 뭐, 이런 생각들을 해보기도 한다. 만일 그랬다면 분명 내 인생은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 다른 인생의 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지금 내가 나라고 여기는 나는, 여기에 있다. 그 ‘나’를 데리고 나는 앞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곰곰 생각하면, 그 ‘나’도 분명 괜찮은 구석이 있다. 내가 항상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참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다. 그런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싶지 않다. 그건 변명의 여지없이 명백한 잘못이고, 나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잘 할 것이라고 믿는다. 잘못을 통해 내가 뭔가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확신할 수 없지만, 다시 한 번 내게 어떤 갈림길이 나온다면, 나는 올바른 길을 선택할 것이다. 지금 나는 간절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나’자신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이건 너무 뻔뻔스럽군.)
세 번째 꿈에 대한 얘기로 이 긴 글을 끝맺어야겠다. 앞서 말했듯이 이 ‘꿈에 대해서’라는 단상은 얼마 전부터 쓰고 싶었던 글이었다. 그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왔다. 이 단상의 내용에 대한 생각이다. 이런 얘기를 써야지, 또 이런 얘기를 써야지, 머리 속에서 여러 내용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문장으로 뭔가를 써야지 라는 생각이전에, 문장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불과하겠지만. 대체 나는 문장을 통해서 밖에 뭔가를 잘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쓴 내용들이 탄생했다. 또 문장으로 쓰지 못한 내용들도 있다. 또 문장을 통해서, 지금 막 탄생하게 된 내용들도 있다. 하여간 그렇다. 그러나 이 얘기는 미리 준비된 얘기다. 이것은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한 얘기다. 주인공 홀든을 기억하는가? 택시 운전기사에게 ‘뉴욕 센트럴 파크 연못의 물이 얼면 그곳에 있던 오리들은 어떻게 되는가?’를 묻는 친구다. 나는 그 친구의 꿈이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껏 들었던 수많은 꿈들 중에, 그 친구의 꿈만큼 근사한 것은 없었다. 홀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호밀밭에 아이들이 뛰어 놀지. 아이들은 뛰어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호밀밭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낭떠러지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아이들은 위험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몰라. 그리고 결국 그 위험으로 다가가서 낭떠러지로 떨어질 테지. 그때 내가 거기에 서 있는 거야. 그래서 그 아이를 붙잡는 거지. 아이가 떨어지기 전에. 그리고 아이에게 주의를 주고 다시 뛰어놀게 하는 거야. 자, 가서 더 열심히 뛰어놀아라. 걱정하지 말고.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
근사하지 않은가? ‘보잘 것 없는 어른’이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일이지 않은가? 이것이 나의 세 번째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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