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Feels so good' by Chuck mangione 본문
언제 내가 처음 이 음악을 들었던 것일까? 아니, 언제 내가 처음 이 음악의 제목을 알게 된 것일까?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이 음악과, 이 음악의 제목을 알게 되었다. 척 맨시니의 ‘필 소 굿.’ 으흠. 척 맨시니하면, 자연스럽게 칙 코리아나, 팻 맷쓰니 등등의 이름이 연상된다. 그렇다고 내가 재즈 매니아라는 건 아니다. 나는 어떤 것이든, 그렇게 열중하지 않는다.
별 시시한 일들을 잘도 기억하는 내가, 이 음악과 맺게 된 최초의 인연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내게는 이 음악과 관련된 몇 가지의, 역시 시시한(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기억들이 있다.
첫 번째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벌써 이것이 작년 일이라니!) 나는 그 여름, 대학원에서 경비를 지원해준 덕분에 프랑스 남부지방에 있는 아비뇽이라는 작은 도시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비뇽의 연극 축제를 탐방 취재한다는 명목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그다지 이 여행에 끼어들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명단에 이름이 들어갔고,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하고 의사표시를 했을 때는 이미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여행은 즐거웠다. 아비뇽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고, 나는 한껏 기분이 풀어졌었다. 이 여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성사시킨 후배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하고 싶을 정도다. (잘 지내고 있겠지?)
일주일 정도 우리는 그 도시에 머물면서, 공식초청작을 중심으로 하루에 두세 편 씩, 거의 열 댓 편의 연극과 공연을 관람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작품이 있다면, 비공식작도 몇 편씩 관람하기도 했다. 공식초청작들은 (나는 잘 모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단이나 연출가들의 작품으로, 그것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는 건 희곡이나 연극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경험이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는 끔찍하게 따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아비뇽에 도착한 첫 날, 시차도 적응이 안 된 채 보게 된 첫 번째 작품은, 세 시간이 넘는 공연 동안 눈을 뜨고 있었던 건 고작해야 이 삼십 분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무대 맨 앞 좌측 귀퉁이에 앉아 있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뜨자, 바로 내 앞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어서 깜작 놀라기도 했다. 족히 몇 백 명이 넘는 관객들이 그 배우의 연기와 함께 그 앞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비행기에서 훔쳐 온 담요까지 덮어 쓰고 있었다!) 며칠 뒤 나는 같이 온 친구들에게 딱 잘라 말했다. ‘더 이상 말 많은 공연은 관람하지 않겠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댄스공연이나, 서커스 공연을 위주로 일정을 짜서 나 혼자 돌아다녔다. 그래서 보게 된 모던 댄스 공연의 작품 제목이 바로 ‘필 소 굿.’이었다.
첫 날 연극공연도 그랬지만, 이 작품 또한 해가 진 뒤에 시작하는 밤 공연으로, 공연장으로는 족히 백 년은 넘은 듯한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추측컨대 수도원 건물 쯤 되지 않았나 싶다. 고풍스런 벽돌 건물로 둘러싸인 회랑이 바로 무대가 되고, 그 반대편에 임시로 관객석을 마련했다. 관객석에 앉으면 바로 머리 위로 하늘이 보인다. 이게 굉장히 멋지다. 나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어두워져가는 여름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웅성웅성 떠들어 대는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탓에, 때로 그들의 언어는 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윽고 해가 저물면 공연을 시작하는 벨이 울리고, 주위는 일순간 고요해진다. 그리고 고풍스런 중세풍의 건물을 배경으로 한 무대에 불이 들어온다. 이건 정말 한 여름 밤의 꿈같다.
‘필 소 굿’이라는 제목의 댄스 공연에서 실제로, 척 맨시니의 ‘필 소 굿’의 음악이 쓰였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거의 힙합 댄스나 브레이크댄스처럼 빠르고 격렬한 춤이었고, 당연히 음악도 비트가 빠른 곡들이었다. 그 공연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기에 좋은 공연이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춤은 정말 잘 췄고, 나는 아주 재밌게 보았다. 제목 그대로 아주 좋았다. 그날 밤 나는 곧장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가게에서 캔 맥주를 사서 아비뇽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거리에는 작은 도시의 축제답게 어디나 젊은이들로 가득했고, 이곳저곳에서 거리 음악공연도 펼쳐졌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전자 바이올린이 포함된 공연이었는데 그들이 철수할 때까지 나는 그 앞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빠르고 신나는 음악을 연주할 때면, 흥이 난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그것도 굉장히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그들의 춤은 남녀가 짝을 맞춰 추는 전통적인 포크 댄스의 일종이었다. 저런 건 아마 학교에서 배우나 보다 싶었다. 캔 맥주를 한 손에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남자 녀석 둘이 시시덕거리며 역시 여자 둘의 뒤꽁무니를 좇는 걸 보기도 했다. 서울이든 아비뇽이든 밤늦은 시각에 젊은 남자들이 추구하는 건 똑같구나 싶어 새삼스러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그녀들을 유혹하는데 성공했을까? 이미 지난 일이지만, 아무쪼록 그들이 잘 되었기를 빌어본다.
주제에서 벗어나긴 하지만, 이 아비뇽에서의 추억을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번에는 아비뇽을 벗어나 버스를 타고 교외까지 나가서 보게 된 서커스 공연도 멋졌다. 과연 서커스 공연답게 넓은 공터에 커다란 대형천막을 쳐서 만든 공연장이었는데,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그 앞 풀밭에 누워서 빈둥거렸다. (이때도 역시 비행기에서 훔쳐온 담요가 요긴했다.) 표를 살 때 내 앞 줄에 서 있던 어떤 어린 소녀의 모습도 뚜렷이 기억난다. 그 애는 초록색의 시원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부모의 손을 붙들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처음으로 동양 사람을 본 듯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짧은 숏커트의 빛나는 금발의 여자아이로 정말 인형같이 예뻤던 걸로 기억한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그 공연은 역시 대사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슬픈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전형적인 서커스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는데, 그게 가만히 듣고 있으면 꽤 슬프다. 그래도 좋았다.
‘필 소 굿.’에 관련된 첫 번째 기억에 대한 얘기가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져서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이번에는 두 번째 기억에 관한 얘기다. 이것은 작년 가을의 일이다. 그러니까 아비뇽을 갔다 와서 얼마 뒤다. 이런 데서 이런 얘기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그녀도 분명 이 글을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가을에 1년을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것은 9월 초의 일로, 아직 여름의 무더운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가을은 깊었고,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로의 어느 테이크 아웃 커피 전문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에 붙어 있는 긴 바형의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종이컵에 담겨진 커피를 앞에 두고 대학로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가게에서 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 그렇게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음악은 가을에 들으면 제격인 음악이다. 가을하면 생각나는 음악, 베스트 텐을 꼽으라고 한다면 반드시 순위 내에 들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 스물아홉 살이었고, 대학원을 휴학한 상태였다. 조바심을 내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미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곤란함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전히 내가 뭘 구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뭐라 해도 이 음악만은 좋았다. 평일 낮의 대학로 거리도 좋았고, 커피도 맛있었다.
세 번째 기억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역시 말하기가 아주 곤란하다. (그녀도 여전히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내 글을 읽고 있을까?) 그러니까 이건 올 가을의 일이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나는 한 여자를 만났고, 그녀와 자주 밤늦은 시간에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는 했다. 그러면서 참 많은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그건 좋았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이든,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제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였는데, 나는 농담처럼 자주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의 제목을 가르쳐주고는 다음번에 다시 물어보겠다고 말하고는 했다. 제목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음악을 들었다. 이 음악의 제목은, 척 맨시니의 ‘필 소 굿.’
그게 어디서였을까? 그리고 그게 정확히 언제였지? 아쉽게도 그 자세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음악만은 내가 나중에 다시 물어보게 된다면, 그건 우리가 헤어질 때일 거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분명 그 전에 주고받던 농담의 끄트머리에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음악의 제목을 다시 물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그렇게 말했던 음악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보같이. 하지만 얘기했다시피, 이제 기억이 났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음악은 9분이 넘는 긴 연주곡이다. 음악이 시작되고 약 1분 40여초 동안 색소폰(맞나?) 솔로가 이어진다. 간간이 기타(맞나?) 소리도 들리지만,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다. 전반부의 색소폰 솔로는 분명 이 음악의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퍽 슬프게 들린다. 마치 흐느끼는 듯 아주 느린 템포다. 하지만 곧 음악은 흥겨워진다. 여러 악기들이 섞여 들고, 템포도 빨라진다. 똑같은 멜로디인데도,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굉장히 드라마틱한 음악인 셈이다. 스토리가 있다. 어떻게 보면 뻔한 구성이지만, 그래도 좋다.
사실 이 글을 처음 시작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런 거다. ‘세상에는 정말로 좋은 게 많다.’ 중학교 시절, 안톤 슈낙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을 꽤 심취해서 읽었었던 것 같은데, 이제 생각해보니, 대체 ‘슬프게 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게 뭐 그렇게 재밌는 일이라고 길게 썼는지 모르겠다. 그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뭔가를 써보라고 한다면 나는 적어도 그보다는 더 길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몇 번인가 말했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계절이 바뀌는 냄새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하늘, 비 오는 날 타는 좌석버스, 물웅덩이에 비치는 풍경, 여자를 바래다주고 혼자 돌아오는 차 안, 그때 듣는 라디오, 가로등 그늘, 싸늘한 겨울 아침 목 끝까지 덮은 이불, 따뜻한 털장갑, 겨울 길거리에서 사 먹는 오뎅, 그 뜨거운 국물, 난로를 앞에 두고 마시는 포장마차에서의 소주 한 잔. 정말 나열하기 시작한다면 끝도 없이 쓸 수 있다.
물론 살아간다는 일이 좋은 일들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일반론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노력과 시간을 내줘야 하고, 결코 원하지 않았던 가슴 아픈 일들도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때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좋은 것들을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건 어쩌면 불행한 일들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좋은 일들을 정말로 좋아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좋은 일들은 항상 거기에 있는데,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막상 쓰고 보니 이 역시 시시한 일반론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란 인간이 원래 이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사실 나는 요즘 내 옆에 없는 사람을 자주 생각하고는 한다. 그녀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녀를 생각하는 건 분명 마음 아픈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 같은 경우는 오른쪽 가슴 아래편이 싸해진다. 나는 그 위치를 손으로 더듬어보고는 한다. 이를테면 지금도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염없이 해보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라도 같이 보낼 수 있다면!) 하지만 살아가면서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만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사는 재미는 조금 덜해질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것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좋다. 정말 좋아? 그래, 좋아.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