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사랑에 대해서 본문

단상

사랑에 대해서

물고기군 2002. 12. 7. 06:43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 어려움 중의 하나는 사랑은 때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의미를 한데 아우르는 단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하나를 구별하지 않는 것은 일견 무지나 소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때가 되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어떻게 끝나는지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내게도 지극히 궁금한 일이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그 시작과 끝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일종의 사고(사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발생했다가, 또 아무런 이유 없이 소멸된다. 그런 면에서 운명과 닮아 있다.


1.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 : 폭력

내가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이미 <싸움에 대해서>라는 앞글의 말미에서 언급했던, ‘타자와의 거리 없앰’, ‘자기 자신을 내던지기’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싸움에 대해서>의 두 번째 이야기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제 내가 말하게 될 ‘사랑’은 어쩌면 굉장히 특수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정말로 사랑이라는 행위가 ‘타자와의 거리 없앰’이라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위이다. 타자(대상)와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주 가까워지는 것뿐이라 해도 그 위험성은 줄지 않는다. 그 위험은 그렇게 대상과 거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주체는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고, 무의미로 전락해버린다는 데 있다. (‘거리 없앰’ 자체를 이미 자기 ‘의미’ 상실로 규정할 수 있다. 사랑은 ‘존재의 사건’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이 ‘섹스가 자살의 한 형태’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지 않나 싶다. 사랑은 때로 주체의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의 ‘죽음’은 존재의 죽음이 아니라, 의미의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자발적인 죽음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꺼이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며, 자신을 대상에게 내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앞글에서 얘기했듯이, 자신의 존재도 의미도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불완전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잉여’(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의미화 되지 않는 대상)와, 손에 쥘 수 없는 ‘결락’이 존재한다. 종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절대자에게 자신을 내맡길 때에만 인간은 자신의 결락(근원적인 불안)에서 해방되고,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여길 수 있게 된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사랑의 ‘대상’과 종교의 ‘대상’은 서로 다르다. 사랑의 대상은 종교의 대상처럼 아주 숭고한 성녀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주 비천한 창녀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대상의 불완전함(비천함)이 주체를 더욱 세차게 끌어당기기도 한다. 그런 대상의 불완전함을 자신이 메움으로써 주체는 자신도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다분히 존재론적인 해석이다. 실제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사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이라는 행위 중에는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가? 먼저 주체는 그 대상을 결코 온전한 형태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당연한 얘기다.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손에 쥘 수도(소유할 수도) 없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과 대상이 한데 섞인 괴물 같은 신체다. 하지만 그것은 추악하지 않다. 완전하므로 오히려 아름답다. 이때 앞서 말했듯이, 대상이 불완전하면 할수록, 또 알 수 없으면 없을수록, 주체는 대상의 불완전함과 알 수 없음을 메우기 위해 더욱 자신을 대상에게 내던진다.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팜므파탈’(요녀)의 경우를 설명해준다. 대상을 향한 욕망은,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에 더욱 쉽게 이끌린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이해와 신뢰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와 신뢰는 대상과 주체의 거리를 만들어주므로, 방해요소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만일 대상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이 된다 해도 (자신이 알던 대상이 거짓이라고 판명된다 해도), 이미 거리가 없는 사랑이라는 행위 속에서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대체 거리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의미’가 어떻게 개입하겠는가? 오히려 그런 ‘폭력적인 사건’은 주체를 끔찍한 공포(의미화 되지 않는 대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공포, 그리고 그 대상과 하나 된 자기가 무의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트리기도 하며, 그 결과 주체는 더욱 대상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 ‘폭력’은 ‘치명적인 원인’이 된다. (이 부근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것은 실제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는 종종 상대방을 속이기 때문이다. 나이, 신분, 자신의 처지, 심지어 영화 ‘크라잉 게임’에서처럼 성별을 속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것을 사랑의 위대함, 또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것이 비록 일시적이고, 어쩌면 거짓일지라도 자신의 불완전함을 대상을 통해 메우려는 노력이 어떻게 잘못이겠는가? 그 완전함의 추구, 그 절정의 쾌락(행복)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폭력’이다. 자기 상실이다. (‘폭력’이라는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 나는 굉장히 고심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분명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겪는 실제의 ‘폭력’과 형태는 흡사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 이 폭력은 ‘대상’에 의해 촉발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대상이 행하는 폭력이 아니다. 이 폭력은 ‘존재의 사건’이다.) 그리고 그 폭력을 주체가 견뎌내지 못했을 때, 즉 의미화에 실패했을 때(적절하게 의미화 해내지 못했을 때), 주체가 겪게 되는 운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글을 통해 내가 하려는 말의 골자다.


2. 폭력의 결과 : 문학작품에서의 사례

나는 앞서 <싸움에 대해서>라는 글에서, 폭력에 대응하여 의미화(거리두기)에 실패한 주체가 겪는 운명의 몇 가지 사례를 간략하게 언급했다. 거기에 덧붙여 여기서는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문학동네, 2001)에 포함된 작품 하나를 사례로 제시하겠다. 이 작품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이것은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의 이야기다. 유태계 폴란드인이었던 쇼넨바움은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해발 5000미터 고지에 있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간다. 폴란드에서 재봉사 출신이었던 그는 그곳에서 역시 재봉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 자리를 잡은 지 15년이 지난 어느 날 쇼넨바움은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했던 또 다른 유태인 ‘글루크만’을 만나게 된다. 반가움에 아는 체를 하지만 글루크만은 대뜸 도망을 친다. 그는 자신이 글루크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뒤좇아 온 쇼넨바움이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당했던 고문의 증거, 손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손을 가리키자 사실을 실토하며, 이렇게 첫마디를 꺼낸다. “자네, 날 고발하지 않겠지?” 글루크만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쇼넨바움이 아무리 설명해도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글루크만은 그것이 모두 자신을 포함한 유태인들을 다시 잡아가려는 나치의 속임수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쇼넨바움은 역시 재봉사 출신이었던 글루크만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같이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글루크만은 여전히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장 어두운 뒤쪽 구석 바닥에 일을 하며 밤에만 외출을 한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어느 날 글루크만은 무슨 이유에선지 ‘마치 해방된 사람처럼 한결 확신에 차고 평온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일을 하면서 조그맣게 노래까지 흥얼거릴 수 있게 되었다. 쇼넨바움은 ‘그 가엾은 친구의 머리 속에 살아 있던 잔인한 기억’이 마침내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느 날 쇼넨바움은 글루크만이 바구니에 음식들을 담아 밤마다 어딘가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쇼넨바움은 친구를 뒤좇는다. 글루크만이 찾아간 곳은 어떤 집 지하실이다. 그는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음식들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15년 전 독일의 포로수용에서 글루크만 자신을 가장 학대했던 독일 지휘관 ‘슐체’였다. 쇼넨바움은 그를 보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쇼넨바움을 더욱 공포스럽게 한 것은, 자신을 포함한 유태인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괴물 같은 슐체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글루크만의 얼굴이었다. 글루크만 자신이야말로, 슐체에게 가장 심한 학대를 당하지 않았던가? 쇼넨바움은 극심한 공포에 사로 잡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이윽고 글루크만이 나와 쇼넨바움을 발견하게 된다. 쇼넨바움은 간신히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저 놈은 일 년여 동안 자넬 매일같이 고문한 자가 아닌가! 그런데 경찰을 부르는 대신 저 작자에게 매일 저녁 먹을 것을 갖다 주다니?”

희생자의 얼굴에 떠오른 교활한 표정이 뚜렷해졌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재봉사의 머리카락을 쭈뼛 곤두서게 했고,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가 다음번에는 잘해준다고 약속했다네!”

작품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작품을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긴 줄거리 요약이 되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의심을 품으리라. 이 작품이 어째서 ‘사랑’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 의심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이것이 분명히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언뜻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가지 주제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폭력’이다. 비록 그 ‘폭력’의 발생과, 방향, 형태가 다를 지라도, 똑같이 ‘존재의 사건(주체가 의미화 시킬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폭력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공통점은 앞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든지 간에, ‘폭력’의 결과는 동일한 메커니즘을 보인다.


3. 폭력의 결과 : 전도

사랑의 행위가 주체가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는 행위라면, 이미 그 행위 자체에 ‘폭력’이 예비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사랑이 ‘존재의 사건’이라 함은, 대상과의 거리를 취함으로 획득할 수 있었던 자신의 의미를, 자발적으로 반대로 이번에는 거리를 없애면서 버린다는 데 있다. 주체는 대상에게 자신의 의미를 끊임없이 투사하면서, ‘존재의 사건’으로 다가간다. 그것은 대상의 불완전함에 의해 더욱 촉발된다. 대상의 불완전함을 주체는 자신의 의미로 메우려고 한다. 그러나 그 완전한 메움(존재의 순간)은 쉽게 달성되지 않는다. 유보된다. 그럴수록 대상과 주체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자기 의미의 넘겨줌’(사랑)이라는 행위를 반복한다. ‘선물’을 교환한다. 그리고 폭력이 발생한다. 즉, 대상이 상실된다. (어째서 대상이 상실되는가?) 이때 주체는 이미 자신의 의미를 대상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대상의 상실은 동시에 자기 의미의 상실이다. 주체에게는 이제 바닥이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주 쓸데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의 과거는 후회로 가득 차 있고, 현재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미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있어 미래란, 대상과 관계 맺음 속에서만 ‘의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완전한 무의미(배설물)로 전락한다. 이것은 마치 지진과도 같다. 한 순간에 단단하다고 믿었던 땅이 물처럼 흔들린다. 푹 꺼진다. 주체는, ‘거리가 없기 때문에 싸울 수 없는 괴물’(놀랍게도 그 거리를 없앤 것은 주체 자신이다!)을 만난다.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주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괴물(이것은 주체가 관계했던 ‘대상’ 자신이 아니다. 이것이 ‘폭력’이다.)과 거리를 취해야 한다. 주체는 살아남기 위해, 괴물의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폭력’에 대응하여 제일 먼저 나타나는 주체의 정신작용은 ‘착각’이다. 이것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불치병 환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비록 불치병 환자의 경우는 실제 자신의 죽음이고, 대상을 상실한 주체의 경우는 대상의 죽음(상실)이지만, 이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즉, ‘죽음(상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직 대상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응을 이해하기는 매우 쉽다. 우리는 도처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도 이러한 ‘착각’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환자가 의사의 오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주체는 모든 일이 자기 자신의 또는 대상의 오해라고 생각한다. 곧 사태는 바로잡힐 것이다. 물론 정말로 모든 것이 오해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그건 실제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때로 이러한 경험들이, 주체의 ‘착각’을 더욱 강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다.

이러한 ‘착각’의 사례는 ‘장례 풍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어느 곳에서는 누군가 죽어도 바로 그날로 장례를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 동안 그 시신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고 한다. 만일 가족 구성원 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자. 시신은 그대로 생전 본인의 방에 놓여 있다. 저녁 식사 시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그러면 어머니는 아들에게 할아버지 방에 가보라고 한다. 아들은 식탁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의 방에 갔다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입맛이 없으시데요.’ 그럼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우리끼리 먼저 먹자구나.’

그 형태는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장례 절차’는 대개 이러한 착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음으로써 주체는 ‘대상의 죽음’이라는 ‘폭력’과의 대면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 시간적 선후는 분명하지 않지만, ‘분노’의 정신작용도 더러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착각’이든 ‘분노’든, 이러한 주체의 대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드러난’ 작용이기 때문이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주체는 그것이 금방 ‘착각’임을 ‘분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유보’일 뿐이다. 주체는 아직 그 ‘폭력’을 대면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인 정신작용은, 그 다음(어쩌면 그 이전 : 왜냐하면 그것이 ‘착각’이든 ‘분노’든 결국에는 바로 이 본질적인 작용을 예비하면서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에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전도’다. 그리고 이 ‘전도’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드러나지 않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 ‘전도’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르네 지라르’에게서 빌어 왔다. 그를 읽을 때는 별반 주의하지 않았는데, 이제와 보니 그는 진실을 보았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전도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도 자체가 시나리오의 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시나리오를 짜본다.


첫 번째 시나리오 : ‘폭력’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폭력은 ‘존재의 사건’이므로 주체는 결코 이 폭력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폭력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강화된다. 주체는 어딘가에 그 이유(의미)가 있을 거라고 상정해야 한다. 그것이 어디인가? 여기서 ‘전도’가 발생한다. 대상을 이미 잃어버렸으므로, 주체는 그 이유를 대상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담 남은 건, 주체 자신이다. 그는 폭력의 이유(의미)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 작용은, 놀랍게도 주체가 자기 의미를 찾는 작용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못’이라 해도, 그것은 하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대상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 ‘살해의식’을 통해 주체는 자기 의미를 되찾는다. 이 폭력의 메커니즘을 (‘전도’한 채, 잘못) 반복하는 것이 바로,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대상이 희생자가 되고, 주체는 가해자가 된다. 이 시나리오는 기독교의 ‘원죄의식’과 ‘자유의지’를 설명해준다.

신의 분노(폭력)가 발생한다. 인간은 그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이 아무 이유 없이 분노할 리가 없다. 어딘가에 잘못(원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는 그 잘못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인간이 잘못의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신의 통제를 벗어난 인간 자신의 자율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의지가 신에게 속한 것이라면, 인간은 결코 잘못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유의지’다. ‘원죄의식’과 ‘자유의지’는 모두 다 폭력의 결과다. 신화는 이것을 전도시킨다.


두 번째 시나리오 : ‘폭력’이 발생한다. 그것은 ‘대상’이 가져다 준 폭력이다. 주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끔찍한 폭력(존재의 사건)을 행한 대상도 이해할 수 없다. 주체에게는 대상이 바로 ‘괴물’(폭력)이다. 주체는 대상과 거리를 취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대상을 ‘의미의 영역’ 바깥(무의미)으로 밀어낼 수 없다. 그럴 경우, 대상과 관계 맺는 그 자신도 무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주체는 그래서 대상을 가장 멀리까지 보낸다. 대상의 의미를 맨 꼭대기까지, 혹은 반대로 맨 아래까지 이동시킨다. (이것은 그러나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종속이다.) 대상을 숭고한 대상으로 만든다. 대상은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대상은 가장 비천한 대상이 된다. 이것은 더욱 무서운 사실이다. 주체는 대상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불쌍하게 여긴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스톡홀름 증후군’이나 로맹 가리의 소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시나리오는 결국 하나의 사건을 각기 다른 형태로 ‘잘못’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것이든, ‘폭력’(존재의 사건)은 사라진다. 사라짐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전도’다. 즉, 대상과 주체가 하나였던(신과 인간이 함께였던, 거리가 없었던) 지극히 행복한 순간(낙원)이 있었다. 주체는 잘못을 저지른다. 대상은 상실되고, 주체는 낙원으로부터 추방된다. 여기 어디 ‘폭력’의 사건이 드러나는가? 이 시나리오는 완성되자마자 ‘신화’가 된다. 신화는 언제나 ‘진실’을 숨긴다. 낙원은 언제나 이미 상실되었고, 주체는 상실된 낙원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존재의 사건’으로 다가간다. 그것이 ‘죽음’(폭력)이다. 폭력은 반복된다.

이 ‘전도’의 시나리오는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 문화의 경계에 있는 것이 ‘근친상간(금기)’라고 했다. 또 그는 그에 앞서 ‘선물교환’을 언급한다. 하지만 틀렸다. 근친상간은 일어난 적이 없다. 그것은 금기된 적도 없다. 근친상간도 금기도, 모두 폭력의 결과물이다. ‘근친상간’은 우리가 저지른 적이 없는 우리의 ‘잘못’이고, 그 금기는 숭고한 대상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또한 마찬가지다. 프로이드는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를 아버지가 금지한다. 아이는 ‘어머니’(대상)로부터 분리되고(주체가 되고), (주체의 탄생을 가능케 한)‘아버지의 금지’는 숭고한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말로 아이는 어머니를 욕망했던 걸까? (대체 욕망이 어디서부터 생겨날 수 있단 말인가?) 그 욕망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인가? 지라르는 진실에 한 발 더 가까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모방욕망’이라는 개념을 이용한다.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를 모방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명령을 아이에게 내린다. ‘나를 모방하라!’, ‘나를 모방하지 말라!’ 하지만 이 역시 신화에 불과하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아이는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욕망한 적이 없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모방하려고 한 적이 없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언제나 ‘폭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드러난 일은, 그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것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이 ‘전도’다. 우리는 ‘폭력’을 바라볼 수 없다. 그것이 ‘존재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자신이 그 ‘폭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 도한, 이 전도된 시나리오를 충실하게 따른다.

그녀가 나를 떠났다. 나는 고통스럽다. 그녀가 떠난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왜 나를 떠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 모든 이유들이 충분히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원인이 아니다. 진짜 원인은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다. 내가 부족했다.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나는 그녀를 지켰어야 했다. 그녀가 나를 떠난 건 나 때문이고, 그것은 옳았다. 그녀는 언제나 옳다. 그녀는 내게 완벽한 여자였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절은 정말 행복했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내가 그녀를 얼마를 사랑했는지 알겠다. 나는 그녀가 내게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동시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녀를 그리워한다. 이제 내가 부르는 모든 노래는 찬송가가 되고, 내가 하는 모든 말은 기도가 된다. 어디선가 그녀가 내 노래를, 내 기도를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미를 되찾았다. 나는 행복하다. (이 시나리오는 ‘유행가’ 가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종교적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보고 겪는 모든 ‘실연’이 이와 같은 정신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위의 시나리오는 사태를 단순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그녀가 나를 떠나자, 오히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얼마든지 위의 시나리오와 맞지 않는 사례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폭력’이 발생했는가, 또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작용 했는가 등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분석은 결국 하나 하나의 사례들을 꼼꼼하게 검토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사후적인 검토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폭력’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언제나 위와 같은 정신작용을 이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동시에 누군가 위와 같은 정신작용을 보였다면, 그는 분명히 ‘폭력’을 겪었다는 말이다. 폭력의 메커니즘은 항상 기계적이다.

사랑과 관련된 전도의 시나리오에서 몇 가지 포인트를 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녀가 떠난 건 내 잘못이다. : 전도

2) 그녀는 정말 좋은 여자였다. : 숭고한 대상

3) 그녀와 함께 했던 시절은 정말 행복했다. : 신화


4. 폭력의 발생 : 사랑의 사례

나는 이제 여기서 불충분하나마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 중에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사례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폭력이 주체에게 끼치는 영향관계를 검토하겠다. 하지만 이 분석은 분명 한계를 지닌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사례들은 고작해야 내 자신의 경험(그리고 내가 듣고 보았던 주변의 사례)과 몇 몇 문학작품과 영화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한계는, 폭력 그 자체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폭력은 그것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더욱 자기를 감춘다.


1) 폭력의 방향이 주체와 대상을 결정짓는다.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믿기 어려운 진실을 담고 있다. 물론 그 진실은 이미 앞에서 제시되었다. 나의 작품 ‘톨게이트’를 살펴보자.

주인공 ‘나’는 여자를 떠난다. (실제로는 헤어지자는 표현을 한 것은 여자였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뒤에 여자는 두 번이나 ‘나’를 찾아온다. 처음 폭력의 방향은 내가 그녀에게 행한 것이다. 나는 대상이 되고, 그녀는 주체가 된다. 하지만 마지막 폭력은, 그 대상과 주체를 바꿔 버린다. 이번에는 여자가 ‘나’를 떠난다.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여자는 ‘나’를 피한다. 나는 그녀가 왜 떠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끝내 자신의 입으로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나는 ‘분노’하고 ‘착각’한다. 마치 성지를 순례하는 신도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결국 ‘나’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음을 깨달으면서 주인공 ‘나’는 행복해한다.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만일 첫 번째 폭력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면, 그 사랑이 과연 신화가 되었을까?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첫 번째 폭력이후 주인공 ‘나’의 생활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렇다. 고백컨대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그때 ‘나’에게 그녀와의 사랑의 사실은 아직 신화가 아니다.) 신화를 만드는 건, 언제나 대상을 상실한 주체다. 대상은 신화를 만들지 않는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미 과거의 일이므로, 거기에는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폭력의 방향이 바뀜으로써 그것은 갑자기 신화가 된다. 폭력이 발생했는가, 그 폭력의 방향은 어느 쪽인가,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다.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이런 사례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변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남자가 먼저 여자를 떠난다. 여자는 남자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남자는 여자에게 돌아온다. 여자는 남자를 받아들이지만, 또 무슨 이유에선지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를 떠난다. 이제 여자에게는 미련이 없고, 남자는 괴로워한다. 여자가 가지고 있던 신화는 사라진다. 다만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이제 신화는 남자의 것이다.


2) 한 대상의 거듭되는 폭력은 주체를 대상에게 완전히 종속시킨다.

이것은 방금 언급한 사례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만, 단지 폭력의 방향만이 바뀌지 않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언뜻 떠오르는 것이, 앞서 얘기한 ‘팜므파탈’의 경우다. 대상은 주체에게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지고, 다시 다가오기를 반복한다. 주체는 거듭되는 폭력으로 점점 더 대상에게 종속된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도 이것의 예를 보여준다. 여자(은수)는 남자(상우)를 떠난다. 남자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여자는 남자를 찾아간다. 남자는 그녀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여자는 떠난다. 남자는 철저하게 망가진다. 첫 번째 폭력 이후 적어도 상우는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폭력이 발생하자, 그는 직장을 그만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또한 거듭되는 폭력이 만들어낸 한 남자의 신화를 보여준다. (작가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폭력’을 테마로 삼고 있다.)


‘시마모토’는 주인공 ‘하지메’의 국민학교 동창이다. 하지만 둘 다 중학생이 되어 학교가 갈라지고 집이 이사를 하면서 서로 연락을 끊게 된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 하지메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둔 상태다. 그때 시마모토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다. (대상은 알 수 없는 대상이다.) 그녀는 국민학교 이후 몇 십 년만의 첫 만남에서 하지메가 ‘또 만날 수 있을까?’라고 묻자, ‘아마도’라고 대답한다. 그 뒤로 시마모토는 하지메가 경영하는 카페를 몇 번인가 찾아오지만 언제나 ‘아마도’와 ‘당분간’이라는 말만을 남기고 떠난다. 그녀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하지메는 그녀에게 점점 빠져든다. 결국 하지메는 가족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시마모토와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시마모토는 이미 사라진 뒤다. 하지메는 그녀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 뒤로 매일매일 그는 시마모토와의 일을 기억하고, 시마모토의 환상을 본다. 하지메는 ‘사막’을 생각한다. 고교시절의 동급생이 얼마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낸다. “모두들 제각기 다른 다양한 삶의 방식을 취하지. 다양한 죽음의 방식을. 그러나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닌 거야. 마지막에는 사막만이 남지.” 하지메가 결국 시마모토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자신이 고교 시절 심하게 상처를 주고 망가뜨린 ‘이즈미’를 거리에서 우연히 보고 난 뒤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 또한 현재 자신이 상처를 주고 있는 아내 ‘유키코’ 덕택이다. 그녀는 자신이 시마모토와의 일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 동안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져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지메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유키코는 자격은 당신이 지금부터 만들어나가야 되는 거라고 말한다. 그날 밤 하지메는 새벽까지 깨어있게 된다. 하지메는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환상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주방 테이블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앞서 말했듯이 신화에 불과하다. 하지메 스스로 결국에는 알게 되었듯이 시마모토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다만 그가 몰랐던 것은, 그것이 거듭된 폭력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가 자신이 당한 폭력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행한 폭력의 결과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하루키의 거의 전 작품들을 읽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는 분명 ‘폭력’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차츰 차츰 진실에 다가가고 있었다. 최근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작품집에서 그는 그 폭력을 ‘지진’에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굉장히 적절한 비유다.)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량상으로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결국 하지메가 시마모토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 계기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고, 타인을 도움으로써, 자신을 도울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은 언뜻 보면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그것은 바로 중요한 건 언제나 ‘마지막 폭력’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폭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폭력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마지막 폭력이 어느 경우에는 그 방향을 바꾸고, 또 어느 경우에는 폭력 그 자체를 강화하는가? 이 대답을 나는 여기서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사실이 끌고 오는 다른 또 하나의 사실을 살펴보자. 만일 주체가 다른 대상과의 관계 맺음에서 또 다시 ‘폭력’을 경험했을 경우, 이전의 대상과의 관계 맺음에서 겪은 폭력은 어떻게 되는가?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이전 폭력의 결과는 사라지거나 완화되는 것 같다. 이전 사랑의 신화와 숭고한 대상도, 새로운 신화와 새로운 대상으로 대체된다. 이제 더 이상 이전의 대상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에서 상우가 은수의 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죽음을 겪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두 번째 사랑이 ‘끝’난 후다.


3)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위의 말은 사실 틀렸다. ‘폭력’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은 숨어 있다. 다만 폭력의 결과만이 나타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 깊이 기억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 결과를 통해, 거기에 ‘폭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일어나 일은 ‘폭력’ 단 한 가지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설명은 ‘사랑의 사실’에서 ‘폭력’이 반드시 ‘헤어짐’, ‘실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은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았을 때도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 자체가 처음부터 폭력을 예비하는 위험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언제나 숨겨져 있고, 폭력 이후에도 대상이 주체를 떠나지 않으므로(죽지 않으므로), 그 결과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다음 절에서 설명하겠다. 변심이나 부정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거짓말’도 그렇다. 이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얘기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대상이 어느 한 순간, 전혀 모르던 것이 된다. 이때 이미 대상과 거리는 없는 주체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주체는 대상에게 자신의 의미를 내어줬기 때문에, 대상의 그러한 ‘변신’은 자기의 의미의 상실이나 ‘변질’과도 같다. 이것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다.


5. 죽지 않고 주체를 떠도는 대상(유령) : 주체의 종속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에서 대상의 상실로 인해 주체가 겪는 폭력, 그리고 주체가 겪는 고통을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몇 번이나 반복하지만, 그것은 ‘존재사건’이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흔한 일이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랑의 기억을 신화로, 또 상실된 대상을 숭고한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극복해낸다. 이를테면 그것이 결국 폭력의 결과일 뿐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름다운 추억이고, 때로 우리는 그 추억을 통해 앞으로의 삶을 살아나갈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고통을 극복해내는 것은 아니다. 하루키의 초기작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가 그랬고,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이즈미가 그랬다. 그들은 결국 자살을 택하거나, 또 자신의 남은 삶을 포기한다. 이런 예는 문학작품에서 수도 없이 많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 또한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단순히 이 모든 예들이 소설 속의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생을 망치고, 또 결국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다. ‘폭력’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 마음을 더욱 괴롭히는 건, 죽지 않고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대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죽어야 함에도 죽지 않고 주체의 곁을 맴도는 유령(대상), 그 결과는 주체의 대상에의 ‘종속’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종속’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건, 주체 자신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앞서 ‘폭력’의 결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그 핵심적인 내용을 ‘전도’라고 했다. 주체에게 가해지는 대상의 폭력으로 인해 전도가 발생한다. 이 전도의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1) 주체는 ‘폭력’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2)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대상’을 숭고한(비천한) 대상으로 만든다. 3) 대상과의 관계를 ‘신화’로 만든다.

이해하겠는가? 만일 그 대상이 죽지(상실되지) 않고, 여전히 주체의 곁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다. 주체는 이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긴다. 주체는 이제 대상을 두려워하면서(또는 불쌍히 여기면서) 숭배한다. 주체는 자신이 대상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스톡홀름 증후군’의 이면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이 그 전부는 아닐 지라도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행위의 대부분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왜냐하면 그 ‘전도’를 행한 것이 주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주체는 도저히 자신의 의미를 되찾아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결코 그 ‘폭력’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기억하는 건, ‘폭력의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폭력의 결과일 뿐이다. ‘폭력’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주체의 눈을 가리며 스스로를 숨긴다. 그리고 그 결과(전도)를 통해 주체를 대상에게 종속시킨다. 이것은 정말로 무섭다. 주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 유령의 곁에서 자신도 유령이 되어간다. 점점 몸이 굳어지고, 결국에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6. 폭력은 죽지 않는다. : 폭력은 기계다.

폭력의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언제나 ‘죄의식’과 ‘신화’와 ‘숭고한 대상’을 만들어 낸다. 이 세 가지 전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스스로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 폭력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동시에 폭력이 발생하면, 반드시 전도가 행해진다는 말과 같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폭력은 언제나 똑같은 메커니즘을 반복한다. 폭력은 기계다. 주체는 결코 그 폭력에 대항해 싸울 수 없다. 만일 대항해 싸울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말하는 ‘폭력’이 아니다. ‘폭력’은 주체가 의미화해낼 수 없는 ‘존재사건’이며, 항상 주체의 죽음을 담보로 한다. 주체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것을 ‘전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지식도, 어떤 현명함도, 어떤 강함도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체 자신이 이미 폭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많은 시간이 흐르면 어떤 일들도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고통도 결국에는 잊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주체에게 가해진 대상의 폭력은, 주체의 의미가 아니라 존재에 남아 있다. 그 자국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일들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폭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것은 영화 속의 ‘터미네이터’처럼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 우리를 쫓는다. 그리고 결국에는 확실히 붙잡는다. 그것이 죽음이다.


7. 폭력의 원인

나는 줄곧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와 관련하여 폭력을 설명해왔다. 그리고 마치 그 폭력이, ‘주체가 대상과 거리를 없애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사랑’이 폭력의 결과라고 얘기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사랑’조차도 폭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고 겪는 실제 형태의 ‘폭력’ 또한, 충분히 여기서 내가 설명하는 ‘존재사건’으로서의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똑같다. 언제나 전도된다. 만일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주체는 영원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신문이나 티브이를 통해 보고는 한다. 십 몇 년 간이나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딸의 이야기, 집단 따돌림을 당해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중학생 이야기. 어째서 그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동안, 주위의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었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그 고통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대상을 스스로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통해 배울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다시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 중에 발생하는 폭력으로 돌아가자. 지금까지의 나의 설명에 의하면 대상의 상실로 인한 폭력의 ‘크기’는, 마치 이전에 주체가 대상과 얼마나 거리를 가까이 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이를테면 주체가 대상과 거리를 없앴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틀렸다. 그것은 쉬운 해답처럼 보이지만, 충분한 해답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도 역시 ‘전도’라는 개념을 사용하겠다. 나는 이미 ‘폭력’이 주체의 의식을 전도시킨다고 설명했다. 이전의 대상과 함께 했던 시간을, 신화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해답이다. 실제로 주체와 대상은 거리가 없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하나였던 적이 없다. 어쩌면 그들이 하나였던 순간은, ‘폭력’의 발생, 바로 그 순간에 국한되는지도 모른다. 폭력이 주체와 대상간의 거리를 없앤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였던 순간은, 언제나 이미 상실되어 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언제나 단 한 가지, ‘폭력’ 뿐이다. 이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 다음 질문을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내 스스로 던졌던 질문이다. 즉, 어째서 ‘자기 의미 상실’이라는 끔찍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대상과의 거리를 없애는 사랑의 행위에 몸을 던지는가? 주체는 어째서 대상을 원하고, 대상에게 자신의 의미를 내어주는가? 나는 앞에서 그것이 주체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분명 일정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충분하지 않다. 내 대답은 이렇다. 그 역시 ‘폭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문제를 단순화시킨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시나리오로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 주체는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대상과의 하나 됨’의 순간(신화)을 반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주체는 결코 그것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전도된 신화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시치프스의 신화’와도 같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폭력’이 주체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주체가 대상과 거리를 없애는 것은, 언젠가는 대상이 상실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상실됨, 그 ‘폭력’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것이 사랑일까?)이 주체를 더욱 대상을 향해 끌어당긴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폭력’을 향해 다가간다.

폭력이 신화를 만들고, 신화가 폭력을 만든다. 이것은 마치 클라인씨의 병과 같다. 과거는 현재의 결과에 불과하고, 현재는 과거의 결과에 불과하다.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있었던 일은 언제나 단 한 가지, ‘폭력’이다.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감춰져 있다. 그것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8. 윤리학

이제 이 긴 글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르렀다. (내가 처음 이 글을 시작했을 때, 나는 이것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다. 지금껏 홈페이지에 올렸던 여느 단상들과 비슷한 분량의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많은 것들을 새로 깨달았고, 그것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탓에 글 자체에 긴장감이 없어지고, 얘기는 중구난방이고, 논리는 부실해졌다. 중간에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것을 써야만 했다. 이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사랑이 ‘폭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다. 나는 지금 모든 사랑이 ‘폭력’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 같은 건,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로서도 괴롭다. 나는 많은 연애소설들을 써왔는데, 지금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그것들이 다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겠다. 또한 사랑이 ‘폭력’의 결과라는 것과 함께, 다음 몇 가지 사실들도 주장했다. 즉, 폭력은 존재의 사건이다. 폭력의 원인은 폭력이다. 언제나 일어난 일은 ‘폭력’ 한 가지다. 나는 진심으로 이것들을 믿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폭력’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 뜻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거기에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줄곧 말해온 폭력을 다르게 이름 붙인다 해도 그것은 진실이다. 그것은 ‘존재사건’이라 불러도 좋고, ‘잉여’, ‘결여’, ‘떠다니는 기표’, ‘욕망’, 심지어 ‘핸드폰’이라 불러도 좋다.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게는 그것이 꼭 폭력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언제나 주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주체에게 전도를 강요한다. 좋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폭력 자체는 결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이 언제나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의 순간에 행복하다. 그 이면에 무엇이 숨어있든, 누구도 행복을 바라는 인간을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는 없다. 사랑이 끝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추억(신화)은 소중한 것이고, 그것은 분명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것들 중의 하나다. 그것이 없으면 정말로 인간은 살아갈 의미가 없어지는 지도 모른다. 폭력은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탄생부터 ‘원인’이었고, 삶의 순간, 그리고 끝내 죽음의 순간에까지 ‘원인’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윤리학에 관한 문제다.

고백컨대 나는 이 글을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쓸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글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을 테고, 또 다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폭력’의 희생자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정말로 착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다. 그리고 또 고백컨대, 지금의 이 결론부분을 나는 처음에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어떤 말로 이 글을 끝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앞에서 ‘죽지 않고 주체를 떠도는 대상’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다. 대상에게 완전히 종속된 주체에 대해서 얘기했다. 주체는 결코 혼자 힘으로는 그 대상을 떠날 수 없다. 주체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쇼넨바움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주어도 글루크만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주체는 대상의 곁에서만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대상은 주체를 떠나지 않는가? 나는 그것 또한 폭력의 결과라고 믿는다. 어쩌면 그 대상 또한 자신이 주체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이 폭력의 결과로서의 사랑이다. 그것을 진실한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 뭐라 부르던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엇이 옳은가? 라는 문제는, 무엇이 진실(사랑)인가? 또 무엇이 행복한가? 라는 문제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정함의 문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그것이 비록 그(대상)의 잘못이 아닐지라도, 그 조차도 ‘폭력’의 희생자에 불과하고, 또 자기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결코 몰랐더라도, 그는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것이 그의 진짜 잘못이다.”

돌아보면 나 또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해 온 인간이었다. 내 손에도 피가 묻어 있다. 비록 내가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고통을 줬고, 또 그 고통에 책임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들에게 유령일 뿐이라는 걸 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또 그것은 어쩌면 정말 사랑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은 공정한 것이 아니었다. 옳지 않은 일이었다.

공정함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정함이 인간을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누구도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타인의 삶을 망칠 권리는 없고, 더더군다나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망칠 권리도 없다. 누구나 자기 존재에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은 공정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두가 ‘폭력’의 희생자다. 하지만 결코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언어로 그것을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도움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 도움의 행위 또한 스스로 ‘폭력’을 향해 다가가는 것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걸 안다. 그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Lose Yourself' by Eminem  (0) 2002.12.19
'Feels so good' by Chuck mangione  (0) 2002.12.16
싸움에 대해서  (1) 2002.11.29
가족에 대해서  (0) 2002.11.28
진실한 마음  (0) 2002.11.1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