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가족에 대해서 본문
이런 말 이런 곳에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가족 구성원들을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저 ‘가족’을 믿지 않는다. 가족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족’에 대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그저 알 수 없는 것, 그리고 또한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소설은 ‘가족’ 소설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90년대 여성작가들의 ‘가족’ 소설이다. 가족에 대해 무엇을 말할 게 있는가? 그것은 아마 내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치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몇 살 때였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또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지도 않지만,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와 따로 나와 살았다. 어머니가 나만 데리고 집을 나온 것이다. 내게는 위로 형이 셋이나 있다. 그런데 그들과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시절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나지 않고, 내가 기억나는 시절부터 나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 몇 몇 사진을 통해서, 아, 기억날 것 같아, 라고 느껴지는 때는 있다. 하지만 사진이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기억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가짜 기억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또 그게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국민학교 시절 나는 다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형들과 자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나를 두고 갔다. 그때의 어떤 일을 정확히 기억하는데, 나는 어머니가 집을 나간다는 사실을 기뻐했나 보다. 큰 형이 내게 이렇게 물었던 걸 기억한다. 좋으냐고. 그 뒤로 나는 아버지와 형들과 한 집에 살았지만, 자주 어머니의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그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를 그 빈 집에서 기다렸다. 기다리기가 지루해지면 현관문을 열고 나가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아파트 복도에서 어머니의 차가 들어오는 길목을 바라보고는 했다. 이상하게도 그때 바라보던 아파트 건물 앞 도로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차가 들어오는 모습이다.
일전에도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껏 내게도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사귀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고, 또한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고 싶어 했구나.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그것을 결혼을 하고 싶다기보다, 단지 그녀와 같이 살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결혼이라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이유로, 어떤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고 또 결혼을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것이 다르다고 느낀다.
언젠가 심심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프러포즈를 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를 궁리해 본 적이 있다. 사실을 말하면, 프러포즈 같은 거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어느 순간부터 암묵적으로 서로가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지 않겠는가 싶었다. 우리가 흔히 티브이나 영화에서 보아왔던, 근사한 유럽식 레스토랑에서 고급스런 와인과 촛불을 준비하고 풀코스의 식사를 마친 뒤 반지를 건네는 일 따위야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그래도 뭔가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말을 할까? 그저 우리 결혼하자, 라고 말할까? 아니면 최근 티브이 프로그램의 개그처럼, 내 아이를 놔 줘, 라고 말할까? 여러 가지 말들이 있고,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다.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자랑이 아니라 나는 수백 가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문득 이 말을 생각했는데,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와 가족이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