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최근에 내가 배운 것들 본문
1. 사람들은 대개 어떤 결과를 두고, 그 결과를 이끈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마치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처럼 말이다. 그건 분명 맞는 말이다.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언제나 ‘원인(cause)’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게 ‘문제(troubl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 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타당한 원인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원인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떤 결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 결과, 그 일이 발생했을 때만, 원인으로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해답이 된다. 여기서 내가 하려는 말의 골자는, 사실 어떤 결과, 어떤 일의 원인은 어쩌면 언제나 그 숱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단 한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을 ‘치명적인 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치명적인 원인은, 그 결과, 그 일의 발생과 함께 ‘때로’, ‘언제나’ 숨어버린다. 진짜 원인, 해답은 결코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도, 언제나 단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2. 사람들은 어떤 일이 ‘끝’났을 때, 그 ‘끝’만을 생각한다. 그것이 완전히 ‘끝’났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죽음이라든지.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라든지. 단절되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끝’인 동시에, 언제나 ‘시작’이다. 이건 굉장히 뻔한 얘기다. 그래도 문장으로 써보자면, 그것이 끝남으로써, 그 끝이라는 상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국면. 아니다. 틀렸다. 새로운 게 아니라, 연속된 것이다. 이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간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산 사람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으로 산다. 그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일도 완전히 끝날 수 없다. 그 ‘끝’은 존재에 새겨지는 자국에 불과하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의미라는 것은 가능성의 형태로 항상 미래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닫힌 미래, 즉 ‘끝’이라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의미는 죽지만, 존재는 계속된다. 존재는 살아서 언제까지나 그 모든 끝과 시작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3. 두려움만 이겨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삶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이 말은 우리는 거의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