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진실한 마음 본문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중 고등학교 시절 분명 나 역시 꽤나 낭만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아주 단순한 단어의 조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아주 단순한 문장이었고, 또한 완성된 문장이었다. 하나의 단어는, 그 단어만큼의 무게를 가지며, 다른 단어와 뚜렷한 경계를 가지며, 순수한 것이었다. 결코 다른 것이 섞여들 틈이 없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또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단어의 진실한 뜻이었으며, 그 단어의 진실한 실천이었다. 가령, 용서, 평화, 이해, 사랑 …. 또 죽음, 절망, 고통, 슬픔. 그 모든 단어들은 나를 향해 순수하게 열려 있었으며,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분명 그것들을 경험하고, 그 뜻을 정확히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앎으로써 그대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혼돈되어 있었고, 내가 세상을 향해 다가가면 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내 이해의 영역 바깥으로 물러서는 것 같았다. 마치 무지개처럼. 멀리서 바라볼 때는 그렇게 아름답던 것들이, 그렇게 뚜렷하게 자기 영역을 가지고 있던 것들이, 가까이 다가서자 그 경계는 흐려지고, 그 빛깔은 희미해졌다. 대신 다른 단어들을 배우게 되었다. 경험으로 또 학문으로. 세상은 더 이상 단순한 단어의 조합일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복잡한 것이었고, 시간과 공간,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어떤 것도 한 모습이지 않았다. 결코 단순한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고, 단 한 번도 완성되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자신조차 아주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내 자신조차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신뢰할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그 혼란, 그 복잡성, 그 불완전성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거기에서 뭔가 다른 것, 다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즐거워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즐거움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지적 허영이었다고 말해야겠다.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가장 저급한 유희였다고 말해야겠다.
물론 다시 중 고등학교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배운 것은 옳았다. 세상은 결코 단순한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고, 단 한 번도 완성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떤 단어도 손에 쥘 수 없고,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으며, 그 뜻을 순수하게 알고 실천할 수 없다. 여전히 내 자신은 불완전한 인간이며, 심지어 알고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끼치는 인간이다. 해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완전히 사랑할 수 없고,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그 완성에 대한 욕심이 아닐까, 라는 것이다. 손에 쥘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시 그 단순한 단어들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고 났을 때, 어떤 것도 순수하지 않다고 지적 허영에 들떠 떠들고 났을 때, 그 다음, 우리 앞에 여전히 많이 남은 생은 어떡할 것인가? 무얼 바라며 살아야 하나? 뭔가를 완성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무런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어떤 것도 손에 쥘 수 없고, 어떤 것도 고정된 것으로, 완결된 의미로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것들은 간절히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가? 물론 내게는 그것을 지킬 힘이 없다. 나는 결국 그것들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 생각은 나를 몹시 두렵게 한다. 그 두려움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게 남겨진 건, 그 불완전한 기억뿐이다. 그 또한 세월이 반복될수록 희미해지고,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하지만 내가 한 번뿐인 삶을 통해 증명해야 할 것이 고작 그 두려움뿐일까? 어떤 것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지극히 단순한 문장이란 말인가? 결코 어떤 깨달음도 나를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어떤 깨달음도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내게 소중한 것들을 영원히 지킬 힘을 주지 않는다. 결국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실한 마음이다.
다시 노력해야겠다. 다시 단어들을 내 앞으로 끌어와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다. 더 많이 배워야겠다. 소중한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리고도 지키는 법을 배워야겠다.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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