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싸움에 대해서 본문
나는 싸움을 잘 못한다. 신체를 사용하여 치고받는 실제의 싸움뿐만 아니라, 말싸움, 또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싸움 등등.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 그렇다고 싸움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어떤 싸움이든 했다 하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싸움에서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내가 남들과 잘 싸우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내게는 절실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명분이 없는 것이다. 져도 별로 상관없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그 싸움에서 내가 덜 상처받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때로 술이 취하면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고는 한다. 싸우고 싶어진다. 또 여기서 ‘논쟁’과 ‘의견교환’을 구별할 필요도 있다. 때로 나는 사람들과 어떤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것은 ‘논쟁’이라기보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개인적인 생각으론, 단순한 ‘의견교환’인 것 같다.)
그런 내가 싸움에 대해 말한다는 게 우습지만, 세상이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경향과 상관없이 숱한 싸움을 해야만 하는 곳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나라고 그것을 피할 재간이 없었던 셈이다. 그런 싸움을 통해 나도 배운 게 있다.
그것은 이렇다. 싸움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거리’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그녀)가 또는 어떤 일이, 내 눈 앞에 보여야 한다. 실제로 보이지 않더라도, 보이는 어떤 형태로 대상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먹을 뻗든 아니면 크게 소리를 치든 할 수 있다. 또 그 주먹이 헛나가든, 그 말이 상대에게 먹혀들지 않든, 그것은 어쨌든 싸움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때로 우리는 그런 일로 두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것은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내가 너무 쉽게 말한다고 탓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매번 이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진다고 한들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죽으면 두려움도 고통도 사라진다. 그것이 죽음의 좋은 점 중에 하나다.
그러나 정작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이것은 항상 패배하는 싸움이라는 말과 같지 않다. 그것은 이길 수도 없을뿐더러, 질 수조차 없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내 설명을 들어보라. 우리는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너무 멀리 있거나, 또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또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파편적으로) 보이지만, (전체로) 볼 수 없다. ‘그것’은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마치 권투의 클런치와 같다. 또 어쩌면 영화 ‘에이리언’에서 인간의 몸에 숙주를 심기위해 얼굴에 달라붙는 유충 ‘에이리언’과 같다. 하지만 또 그것과 꼭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손에 쥘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대상화 시킬 수 없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 밖에 있다.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대상이지만, 의미화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상화되지 않는다. 의미 없지만 존재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이것을 두려움, 공포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우리로부터 떼어내어 거리를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또한 의미 있는 대상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잡아먹히고 만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의미 없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것’과 꼭 같이, 괴물이 된다. (실제로 그들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자살하게 된다. 또는 그 ‘기억’을 완전히 망각한다. 그것은 ‘의미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기억될 수도 없다. 이는 아이슈비츠를 경험했던 유대인들의 사례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또는, ‘자기’를 상실한 채, ‘그것’에게, ‘주인’에게 종속되어 노예가 된다. 이것은 인질이 되었던 사람들이 겪는 소위 ‘스톡홀름 증후군’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의미 지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그것’을 ‘의미지음’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미는, 그 괴물을 ‘타자’화 시킬 때(‘타자’를 의미 지을 때)만 가능하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 온전한 자신의 신체(봉합된 의미로서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결국 그것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냈다고 해서, 그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가짜 이미지에 불과하다. 환상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실재하지 않는 환영에 불과하다. ‘결과’에 불과하다. 여전히 ‘그것(원인)’은 내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그러니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고, 사라져 있다.) 그것을 뭐라 부르던 상관없다. ‘괴물’이든, 의미화 되지 않은 ‘타자’든. 또한 그것을 ‘실재’라고 하든, ‘진실’이라고 하든, 그리고 ‘존재’라고 하든.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분명 그것은 의미의 영역에 속해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건, 요컨대 우리는 ‘존재’로부터, 또한 ‘진실’로부터 도망쳐야만 ‘의미 있는’ 대상이 될 수 있고, 이 세계(과연 어떤 세계인가?)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싸움(싸움이 될 수 없는 싸움)은 결코 역사로(의미로) 복원되지 않는, 기원적인 싸움이다. 동시에 바로 이 순간, 이 세계에 속한 모두가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싸움이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싸움에 익숙하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싸움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단 한번 그 싸움을 그치고 쉴 수 있게 되는데, 그제야 우리는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서의 ‘발 없는 새’에 관한 얘기를 떠올려보라. 나는 이제야 그 얘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그 싸움은 언제나 공포스럽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고통스럽지는 않다. 우리는 종종 그 싸움을 즐길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그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의미를 버리고, 타자의 의미 속에 포함된다. 무의미한 존재(노예)가 된다. 거기서 순수한, 거의 고통과도 흡사한 ‘쾌락’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부르는 것에는, 바로 이런 ‘타자와의 거리 없앰’, ‘자기 자신을 내던짐’의 행위가 포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이 상실되었을 때(그것은 동시에 자기 상실이다), 우리가 원래 있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즉 다시 ‘의미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완전히 망각하거나, 의미화 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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