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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나는 집착이 강한 편이다. 남들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들을 개인적으로 잘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만, 집착에 관한 한 내 자신 잊지 않기 위해 되새기고 경계하는 실정이라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집착이 강하다. 남들이 믿든 안 믿든, 실제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란 인간을 그렇게 여기든 여기지 않든, 이건 내 문제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몇 가지의 확실한 사례를 끄집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 (그게 몇 살 때였지?) 나는 스스로에게 많은 일들에 대해 무관심해지길 바랐다. 무관심해지기. 이것은 내 삶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일들에 대해 무관심해질수록 내 자신이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느꼈다. 이전에도 한 번 말했..
안녕, 문희야. 참 오랜만에 편지란 걸 써본다. 잘 지내고 있겠지.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벌써 서른이 되었다, 나는 말이야. 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직 스물일곱 살이었는데. 요컨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얘기야. 오늘 널 닮은 여자를 봤어. 요즘 나는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처음 그 여자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정말로 너인 줄 알았지 뭐야. 눈이 크고, 눈 사이가 넓은 게 너와 쏙 빼닮은 여자였어. 미인이었지. 물론 너보다는 조금 살이 있었지만 말이야. 시간이 흘렀으니까,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하지만 너는 아니었어. 주방에서 음료를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내내 그 여자를 쳐다봤어. 다행히도 내게 보이는 자리에 그녀가 앉았던 게지.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였고, 가르마를..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운이 나빠서 덜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된다 해도, 그건 나름대로 괜찮다. 에이, 다른 게 더 좋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반대로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악이다. 물론 운이 좋아서 덜 나쁜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위안이라도 삼을 수는 있다. 다행이네. 더 나쁜 것이 아니니 말이야. 하지만 씁쓰레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전혀 행복할 수 없다. 주머니에 흰 공과 검은 공이 들어있다. 편의상 흰 공을 ‘좋은 것’, 검은 공을 ‘나쁜 것’이라고 해보자.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공을 골라야 한다. 운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흰 공을 뽑아든 사람은 행복할 것이고, 검은 공을..
지금의 나를 떠올리면 스스로도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지만, 한창 춤에 재미를 붙였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의 춤은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춤이다. 나이트 같은 데서 추는 춤 말이다. 그건 재수시절이었다. 1992년.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한창 춤에 재미를 붙였던 때로부터 나는 열 살이나 더 나이를 먹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1992년의 ‘락 카페’라면 금방 어떤 분위기의 춤추는 곳이었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설명하자면, 그곳은 얼핏 보면 일반 카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럴만한 시간이 되면 시끄러운 댄스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특별히 마련된 플로어가 없이 앉은 자리 근처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또는 플로어라 할 만한 중..
우리 동네에는 빵 가게, 또는 제과점이 두 군데 있다. 그리고 그 두 군데의 제과점, 또는 빵 가게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집에서 출발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는 제과점의 이름은, 아마 ‘프랑세즈’ 제과점이고, 길을 건너야 하는 곳은 TV에도 심심찮게 광고가 나오는 ‘파리바게뜨’다. 그 광고의 위력 탓인지,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은 길을 건너야 함에도 불구하고 ‘파리바게뜨’였다. 광고효과는 무시할 게 못된다.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도라고 하는지, 브랜드 파워라고 하는지, 아니면 네임 벨류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신뢰가 간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다지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지만, 굳이 찾아서 먹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데, 이게 라면이나 자장면과 비슷해서..
정직하게 얘기해서, 세상에 여러 가지 행복이 있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소위 ‘미인을 바라볼 때의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 행복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때의 행복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요소(성적이거나 상상적인)들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건지, 나로서는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것은 분명히 ‘바라봄’의 행복이다. 이것을 ‘여성을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남성주의, 또는 속물근성이라고 매도하면 곤란하다. 뭐,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 정신이나 의식,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러니까 내가 남성주의의 화신이든, 결코 상종해서는 안 될 속물이든, 나는 최대한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물론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운(運)도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운이란 단순히 복권에 당첨된다거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가까스로 넘겼다든지 하는 게 아니다. 표를 사는데 자기를 마지막으로 매진되었다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운을, 우리의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미치는 모든 알 수 없는 힘이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운의 한자어 그대로, 그것은 일견 우리와 상관없이 하늘 위에서 빙빙 도는 행성의 궤도 같은 것으로,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것들, 이런 것도 운에 속하는 일이다. 미인으로 태어나는 일이, 잘은 모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그렇게 큰 행운은 ..
내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시절,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 하나하나의 삶을 볼 수 있게 되고, 또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대학 1학년 시절, 나는 동기들과 여름방학 동안 여행을 갔었는데, 우리는 어느 날 밤 ‘진실게임’을 했었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비록 그것은 말 그대로 ‘게임’에 불과했지만, 첫키스의 시기나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장난 같은 질문이 초반에 몇 차례 이어지고 나서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우리들은 정말로 ‘진실’같은 것들을 얘기하게 되었다. 아마도 여행과 맥주와, 새까만 밤하늘의 별과, 고요함,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러한 분위기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 있었던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신입생들은 벌써 서른이거나 스물아홉이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