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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가만히 바라보면, 굉장히 행복해지기도 하고 또 굉장히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행복한 편이다. 거리(distance)에 관해서 어디선가 이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의 인생을 멀리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재미없다. 대신, 인생이란 아무튼 행복한 것이다, 하고 정의 내리는 쪽이 낫다. 물론 자기 자신은 잘 모를 테지만.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 참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는 내 인생을 그렇게 생각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어진다. 알려줄래요, 왜 내 인생이 행복하죠, 내가 무엇을 기뻐해야 하나요?
사람들은 곧잘 운다. 운다는 행위 자체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특별하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가 재채기를 하거나,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점을 제외하면, 운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생리현상과 다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어진다. 아픔이나 슬픔의 감정이다. 그러나 운다는 행위 자체를 깊숙이 따지고 들어가자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가령, 먼저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운다는 행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눈물을 일종의 울음의 전단계 정도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눈물을 흘리고, 다음에 울음을 운다. 눈물만 흘리고, 울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백민석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문득 그의 소설 중의 한 장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여졌는지 궁금했다. 여전히 솜씨 좋게 얽어놓은 문장들이었다. 그에게는 확실히 재간이나 솜씨가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다. 탁월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디다 자랑해도 좋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매력적이지는 않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문장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그 문장들을 솜씨 좋게 잘 다루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은 잘 다듬어서 소설이라는 구조 속에 집어넣어 그 맛을 충분히 살려내야 할 무슨 재료 같은 게 아니다. 좋은 문장이란, 소설 속에 쓰여진 문장이 아니라, 소설 속에 쓰여지지 않은 문장이다.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다.
편의점에서 담배 세 갑과 1.5리터 짜리 다이어트 콜라 페트 병을 샀다. 오천 사백 원이 나왔다. 냉동실의 얼음판을 꺼내 안에 있는 얼음을 빼내고 새물을 채워서 도로 넣었다. 집 안에 있는 컵 중 가장 큰 컵을 꺼내 얼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콜라를 붓는다. 급하게 부은 탓인지 거품이 많이 올라서 잠시 거품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콜라와 얼음으로 가득 찬 컵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마루의 불을 끄고, 방안의 불도 끈다. 시디 플레이어에 김건모 5집 시디를 집어넣었다. 지금은 세 번째 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 김건모 5집이다. 언제 노래였지. 1998년 여름이다. 그 해 여름 나는 장지동의 운전면허 학원을 다녔다. 집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오고 가는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녔..
청소를 하는 중이다. 이제 방 청소는 마치 연례행사와도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계절별이든, 분기별이든, 일 년에 네 번 정도는 밤을 새워 방을 청소한다. 그만큼, 청소할 거리가 있다.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체계도 생겨서, 맨 먼저 하는 일은 옷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순서대로, '책정리', '프린트물 정리'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매번 달라지는데, 이번 청소의 테마는 아무렇게 치워놓았던 옛날 컴퓨터와 그 관련부품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참고삼아 얘기하면 전번 청소의 테마는, '책상서랍정리'였다. 그래서 아직 책상 서랍은 양호한 편이다. 프린트물을 정리하면 지난 번 청소를 언제 했는지 알 수 있게 되는데, 가장 지난 프린트물이 들녘 창작집과 관련된 걸 보니, 3월 말 경이 아니었나 싶..
여기는 다시 파리다. 오후 1시쯤에 도착해서, 같이 온 일행과 간단하게 차를 마시고 헤어졌다. 형네 집으로 와서 씻고 밥 먹고, 메일을 확인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게시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시간쯤 산책을 했다. 날씨는 뜻밖으로 쌀쌀해서 거리에서 반바지에 반팔 티를 입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마치 가을 날씨 같았다. 벤치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너무 멀리까지 걸어 나온 것 같아 되돌아 걸었다. 그러나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다지 멀리까지 걸어 나오지 못했다. 다시 밥 먹고 읽을 책이 없어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다. 3년 전에 역시 파리의 형네 집에서 읽었던 것인데, 처음 보는 책 같았다. 형이 방에 들어가고 이번에는 찬찬히 게시판의 글들을 읽었다. 생각보다 내가 알..
나는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 때면, 악보를 잘 읽을 줄 몰라서, 미리 음계를 직접 행간에 적어두곤 했다. 한 칸 한 칸 손으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꼽으면서 꽤 긴 노래 전부의 음계를 기입하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곧잘 음악선생은 무작위로 학생을 일으켜 세워서 음계로 노래를 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을 전문적으로 듣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고등학교 시절 내가 아는 녀석은 락 매니아여서 락커들의 이름을 줄줄 꾀고, 그 가사까지 다 해석해서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클래식이든, 재즈든, 어느 것에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음악 듣는 것을 참 좋아한다. 술이라도 잔뜩 마시고 ..
요근래 자주 나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나쁜 꿈이었다는 느낌만은, 잠에서 깨어나고도 오랫동안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머리가 이상하다. 두통과는 다르다. 아프지 않다. 조이는 것 같고, 잡아당기는 것도 같다. 자는 동안 누군가 내 머리를 두고 심한 장난을 친 것 같다. 수학여행이나 단체로 떠나는 여행에서 자는 동안 친구들이 벌이는 장난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분이 몹시 나쁘다. 지금껏 삶을 긍정하면서 살아왔다고 믿었다. 고민에 빠져있는 친구에게는, 너는 엄살을 떨고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자기 합리화이거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점이니 입장이니, 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