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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어제 우연히 미국계 보험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다,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이유로(게다가 미국계 보험회사다) 자연스럽게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의 세속적인 관심은 그 친구 보험회사의 손실액이 얼마쯤 되는지, 또 미국의 손실액이 얼마쯤 되는지 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다분히 보험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전문적인 의견이라 나로서는 그런가 보다 고개만 끄덕였는데, 결론적으로 미국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흥미로웠다. 거기에는 물론 일종의 음모론이 바닥에 깔려 있다. 정말로 테러를 가한 것이 빈 라덴일까? 자작극은 아닐까? 뭐 이런 얘기다. 미국 GDP의 십 몇 퍼센트가 군수산업이라니, 테러로 무너진 건물을 다시 올..
'공일오비'를 말하는 것은 내게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하긴 무엇이든, 우리가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없는 일일 테지만, 특별히 더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공일오비'의 첫앨범이 발매된 건 89년이거나 90년일 것이다. 확인해보면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있겠지만, 정확한 연도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공일오비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된 건 그들의 2집을 통해서였다. 1991년 발매. 그 즈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예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좋아했던 교회의 어느 여자와 관련된 몇 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다. 놀랍게도 나는 아직 그 여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십 년 전의 내가 사귀지도 않았던 여자의 이름을 말이다.) 그녀의 이..
1997년 6월 12일. 내가 2년 2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날이다. 그로부터 약 넉 달 간, 나는 같은 동네의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우린 둘 다 다음 해에 복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시절은 S.E.S의 1집이 한창 방송을 타던 때였다. 우리는 아침마다 그 노래들을 반복해서 들으며, 강변을 따라 달렸다. 학교에 도착하는 건 아침 여덟 시쯤이다. 가방을 자리에 놓고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서, 도서관 앞 돌층계에 앉는다. 주위는 환했지만 아직 태양은 충분한 높이로 올라서지 않아 지표에는 햇빛이 비치지 않았다. 하나 둘 씩 가방을 멘 학생들이 도서관 앞 길을 따라 올라왔다. 그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했..
"미안한데, 이 옷 좀 벗을게" 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여자는 실내가 더워서 겉옷을 벗는 것까지 나에게 물어보는 것일까? 여자는 모자가 달린 두꺼운 회색 후드 티를 벗었다. 안에는 가슴부근에 영문 로고가 쓰여있는 얇은 면 티를 입고 있었다. 무슨 색이었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내의 어느 한 술집에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새벽에 영업을 하는 술집이 대개 그러하듯이, 조명은 어둡고 자리는 좁다. 여자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그게 언제였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술집에, 그 시간에 우리가 자리를 마주하고 앉게 된 거지? 나는 기억의 선후관계를 하나하나 따져본다. 여러 가지 기억들이 혼동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벗었던 회..
'모레 오전에 시간 있으세요? 정원 청소 좀 하려고 하는데...'하고 직원이 내게 물었다. '목요일이요?' '아니, 일요일이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저녁 시간에 종로에 잠깐 나갔다. 책을 몇 권 구하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벌써 겨울 군것질 거리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릿노릿한 계란 빵 같은 것 말이다. 금새 오방떡이니, 군밤이니, 고구마니 하는 것들도 잇따라 나올 것이다. 아, 추워라 하고 고개를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종종걸음을 칠, 겨울이 오늘 저녁 벌써 다가와 버린 기분이었다. 아직 반바지를 입은 젊은 사람 몇몇이 보였지만, 선택을 잘못했다는 걸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종로 거리는 겨울에 잘 어울린다. 여름 종로는 지저분한 느낌..
가끔씩 이럴 때가 있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다른 것들과 별도로 따로 챙겨두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것만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 인생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지만, 자동차를 예로 들면, 처음 바퀴를 굴리는 데에는, 바퀴가 구르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보다 더욱 많은 힘을 필요로 한다. 한번 구르게 되면,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은, 최초의 한바퀴를 돌리는 데 드는 힘보다 훨씬 적은 힘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멈추게 하는 것은, 이와는 조금 다른데, 가령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을 제로로 만듦으로써, 단지 엑셀에서 발을 떼는 것만으로,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노면과 바퀴와의 마찰력이나 대기중의 공기의 저항이라든지 하는 요소들이 개입되지만, 그래서 그것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그러한 힘들을 거스르는 노력을 뜻하겠지만, 어쨌거나 차를 멈추게 하는 것은, 출발시키거나 지속시키는 것보다, 간단한 일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것이 ..
어깨가 결린다. 평생 어깨 같은 건 결려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처음 경험하는 통증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직 느껴보지 못한 통증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완성된 소설을 수정하는 작업을, 나는, 즐거운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불완전했던 부분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면서, 완전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는 성과가 있지만, 애초에 도저히 수정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 어떻게 손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런 건 어쩔 수 없다. 다음 소설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빨을 꽉 깨물고, 반성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전혀 고통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은 심하다. 이건 수정이 아니라, 개정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래서 어깨가 결린다. 다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