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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중 고등학교 시절 분명 나 역시 꽤나 낭만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아주 단순한 단어의 조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아주 단순한 문장이었고, 또한 완성된 문장이었다. 하나의 단어는, 그 단어만큼의 무게를 가지며, 다른 단어와 뚜렷한 경계를 가지며, 순수한 것이었다. 결코 다른 것이 섞여들 틈이 없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또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단어의 진실한 뜻이었으며, 그 단어의 진실한 실천이었다. 가령, 용서, 평화, 이해, 사랑 …. 또 죽음, 절망, 고통, 슬픔. 그 모든 단어들은 나를 향해 순수하게 열려 있었으며,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나이가..
1. 사람들은 대개 어떤 결과를 두고, 그 결과를 이끈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마치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처럼 말이다. 그건 분명 맞는 말이다.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언제나 ‘원인(cause)’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게 ‘문제(troubl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 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타당한 원인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원인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떤 결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 결과, 그 일이 발생했을 때만, 원인으로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해답이 된다. 여기서 ..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나는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다. 잠시 서로 말이 없다가, 문득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올 가을 들어 가장 많이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군.” 나는 몸을 돌려 선생님이 바라보던 가게 바깥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저 ‘예’하고 대답했다.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나무 가지가 가르쳐주는 바람의 방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며칠 간 겨울이 온 듯이 추웠다. 사람들은 이미 겨울이 왔다고 느꼈다. 그러다 어제부터 날씨가 풀렸다. 그리고 오늘 나뭇잎들이 바람에 떨어진다. 그 방향이 어디든, 불어오는 것은 그저 바람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생각은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것은 바람일 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소유해선 안돼.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 누가 내게 가르쳐준 것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는 순간,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너무 두려워서 조금씩 조금씩 자기도 모르는 시간에 훼손시키는 거야. 그래서 그것이 이제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제 아무 고통 없이 그것을 버리게 되는 거야. 그럴듯해?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다르다. 이것은 단순한 말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 내 손에 닿지 않는 것, 이미 남의 것. 그래서 그것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지도 모른다. 또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훼손되어 버리는 ..
십년. 뻔한 얘기 같지만, 십년이란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특히 그것이 한 인간의 이십대 시절일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는 잔디밭이 넓은 어느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공원에 들어서면서 나는 그녀에게 뭐 좀 마시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따뜻한 커피. 나는 공원 초입에 있는 조그만 간이매점에서 직접 타 주는 커피 두 잔을 산다. 그것은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녀가 얘기를 끝마쳤을 때, 그것은 약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십년의 얘기를 두 시간동안 한다는 것이, 짧은 건지 긴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 그 평균값을 구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십년이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
최근에 몇 편의 소설을 실패하면서, 품게 된 생각이 하나 있다. 실제로 그것이 옳은 생각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있었던 이야기’가 단순히 작가 자신의 한정된 삶과, 한정된 경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다고 해서, 그 소설 자체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다고 해서’, 그 소설이 ‘있었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있었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립하는 것도 아..
나는 소설이라는 장르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긴 문학이나, 소설도 나한테 관심을 가진 건 아닐 테지만, 또한 내 관심사 따위야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을 테지만, 일일이 그런 걸 신경 써서야 이렇게 문장을 쓸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들, 소설이든 게시판에 올렸던 짧은 글이든, 읽다보면 스스로도 참 한심한 소설(문장)을 썼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부 다 그런 건 아니고, 개중에 몇 개는 지금 보아도 참 대견스럽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부럽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나는 갑작스럽게 내 주변의 무언가가 달라지는 걸 아주 싫어했었다. 나는 그것이 분명 영원히 그대로 있을 거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그것이 그렇게 계속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나 보다. 가령 할머니.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동네 놀이터의 미끄럼틀. 옆 동에 살던 쌍둥이 소녀. (내가 알던 쌍둥이들은 어째서 다들 그렇게 예쁘고 잘 생겼을까?)최근에 주민등록증을 수령하기 위해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살았던 동네에 갔다. 내 주민등록지는 아직도 그 동네로 되어 있다. 단독세대주란 제목으로 말이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으로 많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동네는 여전했다. 미끄럼틀도 그대로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