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소설에 대해서 본문
최근에 몇 편의 소설을 실패하면서, 품게 된 생각이 하나 있다. 실제로 그것이 옳은 생각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있었던 이야기’가 단순히 작가 자신의 한정된 삶과, 한정된 경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다고 해서, 그 소설 자체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다고 해서’, 그 소설이 ‘있었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있었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이 아니라고 해서 성립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일 실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기술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소설이 될 수 있다면 작품의 값어치는 언제나 그 경험의 값어치와 일치하게 될 것이고, 소설은 개인적 삶의 기록에 불과할 것이다. 그 기록이 비록 훌륭한 것(위인전의 경우처럼), 읽을 만한 것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 판단에 의하면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내가 하려는 말의 골자는, 실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는 점이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실제 일어났던 ‘있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물론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그것을 알지 못함은, 우리에게 굉장히 유익한 일,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일지 모른다. 아마 실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많이 불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외면하고, 고통을 모면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한 무슨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또 무슨 일이 있지 않을 수 있었는지,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계단이나 사다리가 되는 것처럼, 그것을 통해 알아가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훌륭한 작가라면 그는 맨 꼭대기까지, 또는 맨 밑바닥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그 두려움은 때로, 자기 자신의 현재의 삶, 그 안에서 조촐하게 누리던 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흡사하다. 악마와 내기를 해야 한다면, 언제나 전부를 걸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전부는, 고작해야 자기 자신밖에 없다.
소설은 이미 한 번 씌어진 이야기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다. 상상력이란 관찰력의 다른 이름이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인간만이, ‘살아있었음을 얘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