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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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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미끄럼틀

물고기군 2002. 8. 6. 00:36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나는 갑작스럽게 내 주변의 무언가가 달라지는 걸 아주 싫어했었다. 나는 그것이 분명 영원히 그대로 있을 거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그것이 그렇게 계속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나 보다. 가령 할머니.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동네 놀이터의 미끄럼틀. 옆 동에 살던 쌍둥이 소녀. (내가 알던 쌍둥이들은 어째서 다들 그렇게 예쁘고 잘 생겼을까?)

최근에 주민등록증을 수령하기 위해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살았던 동네에 갔다. 내 주민등록지는 아직도 그 동네로 되어 있다. 단독세대주란 제목으로 말이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으로 많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동네는 여전했다. 미끄럼틀도 그대로였고, 대학 1,2학년 시절 밤이면 곧잘 전화를 걸던 공중전화부스도 그대로였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챙겨 받고 차를 몰아 내가 살던 아파트 옆 놀이터가 보이는 자리에 갔다. 다행히 낮 시간이어서 주차할 공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시동을 켜놓은 채 멀리서 그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분명 몇 번인가 새로 칠을 하고, 몇 몇 놀이기구들은 안전상의 이유거나 또는 낡아서 새 것으로 교체되었을 테지만, 나는 그 변화를 눈치 챌 수 없었다. 어렸을 적 동네를 찾아가면 그곳이 터무니없이 좁거나 또는 터무니없이 넓어서 놀란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것이 그대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물론 감회는 있었다. 나는 그 동네, 그 놀이터에 얽힌 몇 가지 추억을 간신히 기억해내는 걸로, 다시 찾은 동네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고 생각했다. 차를 몰고 한 바퀴 더 돌아볼까 하다가 날도 덥고 해서 그대로 큰길가로 차를 몰았다.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주변이 상황이 변하지 않길 바라기도 하고, 또 그 반대로 어서 빨리 달라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런데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그 둘 중의 하나라고 믿어버리고 만다. 대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은 그대로 있고, 불리한 상황은 달라지길 바라는 것이리라. 이것은 뻔한 얘기다. 계속 뻔한 얘기를 해보자면, 마찬가지로 어떤 것들은 아주 쉽게, 또 예상치도 못하게 달라져 버리고, 어떤 것들은 오랫동안 그대로 있기도 한다. 그렇게 달라져 버린 것들 중에는 때로 아주 그립고, 못 견디게 만드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보면, 예전에 살던 내 방에서 보이던 풍경. 오락실과 만화가게가 한 층에 다 있던 상가 건물. 전후사정은 기억나지 않고, 나는 곧잘 그 두 곳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해서 돈도 다 떨어지고 날도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던 길의 하늘의 빛깔 같은 것들. 어째서 나는 그 시절 친구 하나 없이 그렇게 혼자였을까? 하여간 때로 그것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사람들은 ‘살아보자’고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대개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냥 살아간다. 그러다 아주 가끔씩, 이제 어떻게 하지? 그래도 살아보자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저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능력, 지금껏 살아온 삶과, 또 이제는 선택지가 좁아져 버린 앞으로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때로 그 시간은 두렵고, 후회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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