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문희에게 본문
안녕, 문희야. 참 오랜만에 편지란 걸 써본다. 잘 지내고 있겠지.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벌써 서른이 되었다, 나는 말이야. 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직 스물일곱 살이었는데. 요컨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얘기야.
오늘 널 닮은 여자를 봤어. 요즘 나는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처음 그 여자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정말로 너인 줄 알았지 뭐야. 눈이 크고, 눈 사이가 넓은 게 너와 쏙 빼닮은 여자였어. 미인이었지. 물론 너보다는 조금 살이 있었지만 말이야. 시간이 흘렀으니까,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하지만 너는 아니었어. 주방에서 음료를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내내 그 여자를 쳐다봤어. 다행히도 내게 보이는 자리에 그녀가 앉았던 게지.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였고, 가르마를 예쁘게 탔어. 짙은 베이지 색의 재킷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 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지. 아마 가족끼리 온 모양으로 일행 중에는 고상한 옷차림의 할머니도 끼어있었어. 마일드 커피를 마셨지. 오늘은 꽤 손님이 든 날이어서 많이 바빴어. 그래도 기분은 좋았지. 영업이 끝나고, 직원들이 퇴근하고 늦게까지 앉아 있던 손님들의 설거지를 나 혼자 하게 됐어. 주방에는 손님 테이블에 잘못 나갔던 레드 와인이 있었지. 화이트 와인을 시켰는데, 레드 와인이 나갔던 거야. 카페의 불을 모두 끄고 주방만 불을 밝힌 채, 설거지 거리를 앞에 두고 그 와인을 마셨지. 정말 맛있더군. 담배도 한 대 피우고, 볼륨을 높인 음악을 들었지. 이건 정말인데, 카페에 혼자 남아서 한껏 볼륨을 높이고 음악을 들으면 근사하단다. 좁은 방안에서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홀은 넓고 스피커는 구석구석마다 위치해 있어서,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리지. 한 번도 그런 데는 가보지 않았지만, 소극장의 실내악 연주를 듣는 기분이랄까. 너와 닮은 여자가 앉았던 자리도 어둠에 잠겨 있었지. 나는 그 자리를 바라보면서 와인을 다 마셨어. 담뱃불을 싱크대의 물로 꺼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힘차게 설거지를 했지. 그리고 맥주 한 병을 들고 집으로 올라와서, 지금 마시고 있어.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단 말이야. 그리고 네게 편지를 쓰고 있지. 안녕, 문희야. 이렇게 말이야.
케이블 티브이에서만 방영하는 건데, ‘도슨의 청춘일기’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회도 빠트리지 않고 보는 건 아니고, 그저 채널을 돌리다가 방영되고 있으면 보는 정도지. 그게 며칠 전에 보니까 ‘시즌 4’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더라. 이를테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거지. 등장인물들도 고등학교 2학년에서, 벌써 대학생이 되었고. 일종의 성장 드라마인데, 당연하게도 굉장히 복잡하게 얽힌 연애담을 주된 테마로 삼고 있지. 정말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나처럼 띄엄띄엄 보다 보면 깜짝 놀랄 정도지. 그러니까, ‘도슨’이라는 주인공과 어릴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내던 여자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보니 도슨의 절친한 남자 친구와 사귀고 있더란 말이지. 하긴 도슨만 해도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사귀었다가, 다시 그녀를 사귀었다가, 또 그녀와 헤어졌다가. 그리고 그 친구도 다른 여자를 사귀었다가, 그녀와 헤어지고 도슨의 여자친구와 사귀었다가, 또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 물론 그 여자도 사정은 다르지 않지. 그녀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아이고. 뭐 이런 친구들이 다 있담. 그런데 말이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잘 지낸단 말이지. 그렇게 서로에게 심한 짓을 했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마주 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야.’라고 말한단 말이야. 계속되는 거야. 언제까지나. 평화. 하긴 드라마의 인기가 시들해지면 그들의 연애행각도 그날로 끝장이겠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나는 말이야, 때로 그런 걸 꿈꾸는 것 같아. 드라마 같은 걸 꿈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친구야, 뭐 이런 거. 우리의 생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어느 날 한 자리에 모여 ‘잘 지냈어? 가끔 네 생각을 했어.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친구잖아.’ 하고 말을 건네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껴. 알겠어? 가끔 그런 걸 바란다고. 내게 아무리 심한 짓을 한 사람이라도, 물론 왜 그때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따져 묻고도 싶지만, 그런 거와 상관없이 몹시 보고 싶어지는 거야. 그렇게 만나서 그 다음에 뭔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야. 우리는 각자의 생을 살아가겠지. 어쩌면 굉장히 마음 아플 지도 몰라.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지. 그건 그대로 남겨 두는 게 옳은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건 드라마가 아니니까. 여긴 현실이니까. 그렇지, 여전히 나는 세상을 잘 몰라.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알고 싶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 항상 도망만 쳤지. 그렇게 도망치다보니 벌써 서른이네. 하지만 그다지 끔찍한 기분은 들지 않아. 서른이라는 나이도 막상 먹고 보니, 별로 어렵지 않아.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아. 나는 이제 이십 대가 아니다, 마음속으로 외쳐 보아도 별 감흥은 없어. 여전히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창문을 열어놓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방 안에서 혼자 춤을 추지. 노래를 큰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하고. 물론 내가 이십 대였을 시절보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이놈의 현실이란 것이 나를 더 강하게 죄어오는 건 사실이야. 화가 나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또 굉장히 두렵기도 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면 여전히 할 말이 없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막상 아침에 일어나면 날씨부터 살핀단 말이야. 맞아. 나는 점점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드라마 같은 희망이나 품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내가 상대해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해서, 현실 - 이 ‘현실’이라는 단어는 너무 막연하다 - 에게 지고 싶지는 않아. 나는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실망할 거라는 걸 알지만, 결국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나는 그대로 갈 생각이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걸 참 싫어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무시당해도 좋아. 누군가 너는 세상을 몰라. 어리석은 인간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좋아. 이건 도망치는 게 아니야. 나는 계속 가는 거야. 나는 이 세상이 공평하길 바라는 거야. 아주 공정하길 바란다고.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만 가지겠어.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지켜내고 싶은 거야. 인간에 대한 신뢰, 세상에 대한 희망, 보잘 것 없지만 이십 대에 내가 꿈꾸었던 꿈, 노래. 너도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어. 정말로. 네가 응원해주면 큰 힘이 될 것 같아. 정직하게 말하면 지금 나는 굉장히 두렵거든.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야. 좌절과 희망을 반복하지.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나는 괜찮아. 평균을 내 보면 아직은 행복한 것 같아. 아직은 춤 출수 있지.
며칠 전에 올림픽 대로를 차로 달리면서 열네 마리의 나비를 봤어.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한 마리 한 마리 숫자를 세고 있었지. 열 네 번 째 나비는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놓쳤는데, 다시 살펴보니 아주 높이 날아올라 있었어. 그리고 다음 날 비가 내렸고, 나는 어느 백화점에 있었어.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바깥으로 나와 처마 밑에 서서 담배를 피웠는데, 화단에 심어져 있던 보라색 꽃이 떨어지는 걸 봤어.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두고 있는데, 꽃이 툭 떨어지더라. 나는 깜짝 놀랐던가? 모르겠어. 세상에 꽃이 떨어졌다고 놀랐다면 좀 우습잖아. 열네 번째 나비와, 빗물에 떨어지던 보라색 꽃에 대해 네게 얘기하고 싶어. 거기에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 내가 배워야 할 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그리고 너한테 얘기하다 보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나는 소리바다에서 다운 받은 음악을 듣고 있어. 이 편지를 다 쓰면 다시 한 번 춤을 춰볼 생각이야. 아주 신나는 음악이거든. 이 음악이 뭐게? 안 가르쳐주지.
네가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어. 너를 바래다주면서 항상 집 앞에서 너를 꽉 안아주었던 그 느낌을 나는 아직 잘 기억하고 있어. 그건 내가 이십 대 시절에 가질 수 있었던 최상의 것들 중에 하나였지. 그건 정말 좋았어. 너한테 참 감사해.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하긴 그 좋은 운을 내가 다 망쳐버린 건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나는 참 어리석은 인간이었지. 어리석음. 그런데 이게 지금의 내가 가진 희망이야. 나의 테마지. 나는 끝까지 어리석은 인간으로 남겠다고. 나는 다 견뎌보겠어. 결코 영리해지고 싶지 않아.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어리석은 인간으로 여긴다면 나는 참 행복하겠어. 나는 계속 가겠어.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도 이런 나를 응원해주었으면 좋겠어. 결국 드라마 같은 얘기지만, 네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든지 간에 우리는 아직 서로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래. 나는 준비가 되어 있어. 왜냐면 나는 어리석은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