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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얘기다. 기억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어떻게 지금껏 그 일을 기억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거나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대개 그러한 공터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낮에는 비어있다. 무슨 일인가로 나는 누군가와 말싸움을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또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추측해보건대, 그건 대단한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호전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항상 움츠려있고, 소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기억이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내가..
특별히 시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 아니, 관심이 없는데, 노트북을 켜면 또 아무 생각없이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읽고는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뉴스란 게 확실히 뉴스여서 뭐가 맞다든지 틀리다든지, 또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일종의 ‘문제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럼 또 나도 그런 걸 생각하게 된다. 대개 뉴스란 게 그렇듯 - 그러니까 또 뉴스란 게 확실히 뉴스여서 - 뭐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보다 잘못 되고 있다는 내용이 많다. 가령 오늘의 (포털) 헤드라인 뉴스는, 자세한 사건의 전개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촛불집회 재판에서 대법관이 일종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개입을 했다는 내용이다.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권력의 시녀로” “신뢰에 금간 대법원…사법파동 또 오나” “..
초등학교 때 수영을 배웠다. 우리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는데, 이 워드 프로그램에선 국민학교라고 쓰면 자꾸 초등학교라고 자동으로 바뀐다. 아무튼, 정확히 몇 학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또 수영을 배우는 걸 내가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적지 않은 기간 수영을 배웠고, 나중에 친구들과 수영장 같은 델 가면 제법 잘하는 축에 속했다. 이상하게도 수영을 배우는 동안에 나는 특별히 친구가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학교나 동네친구와 함께 배우러 다닌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겉돌았다는 건 아닌데, 전혀 나와 어울렸던 또래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대신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어떤 형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는데, 뭐랄까 좀 잰 체하는 녀석이었다. 가슴팍도 넓고 몸매도 날렵했다. 그..
사람들은 누군가 나쁜 선택을 했을 때, 그가 뭘 잘 몰라서 그랬다고 말한다. 이 말은 대개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맞는 건 아니다. 그리고 전부 맞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평가를 내릴 때마다, 그 평가의 절반은 나 자신에게 향한다. 물론 잘 알고도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뭔가가 두려워서 그랬다면, 여전히 뭔가를 잘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라고 의심해볼 수 있다. 마치 자연재해를 신의 뜻으로 여겼던 조상들처럼. 기우제를 지내거나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뭘..
흔히 말하기를 상상력은 무한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과 상상 중에 어떤 것이 더 클까? 즉각적으로 대답하자면 당연히 상상이 더 크다. 왜냐하면 상상은 무한하니까. 어쨌든 현실은 유한하니까. 그런데 나는 최근에 어떤 사례가 떠올랐다. 이 사례가 현실과 상상에 대한, 또 그 크기에 대한 정면의 대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이런 '측면'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말이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섹스를 할 수 있다. 이건 비유적인 얘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 - 자위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실제의 섹스행위보다 자위행위의 경험이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순전한 상상 같은 거 말이다. 우리가 티브이..
나는 배우 임창정을 좋아한다. 개인 임창정은 잘 모르겠다. 그가 출연한 영화중에는 괜찮은 것도 있고, 그저 그런 것도 있고, 왜 만들었는지 모를 영화도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영화에서조차 배우 임창정의 연기에는 뭔지 모를 울림이 있다. 그가 그만큼 연기를 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그건 잘한다 못한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임창정 본인조차 모를 ‘생득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령 ‘일번가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자.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일까? 관점에 따라 괜찮은 영화일 수도, 쓰레기 같은 영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현실을 반영한 영화일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을 감상적으로 어설프게 할리우드식으로 버무려 놓은 영화일 수도 있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생각..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아니라고 한다면, 가령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또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최근에 내가 만났던 여자들은 계속 여자 형제 밖에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 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건 아니고,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열차가 지하를 빠져나와 지상 구간에 접어들었을 때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 그러네, 자매들이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몇 명중에 몇 명이 그랬는지를 밝힐 수는 없다. 어쩌면, 그건 거의 의미 없는 비율인지 모른다. 일종의 규정타석 미달이랄까? 표본자체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점은 확실한데, 나는 그녀들이, 또 그녀가 여자 형제 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여동생, 언니 밖에 없다는 사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적, 스물여섯 일곱 살 때 사귀었던 여자는 무용을 전공했었다. 대체적으로 그녀와의 연애는 즐거웠던 걸로 기억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라든지, 나라든지, 또는 우리라든지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녀도 나도 아직 젊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즐거운 연애를 하기에 적합한 나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그녀는 나보다 세 살(어쩌면 네 살일지도) 정도 어렸는데, 그렇게 스물일곱, 스물넷의 나이란 1,2년 연애경험을 가지고 결혼을 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어린아이처럼 환상을 품지도 않고, 반대로 서로에 대해 늙은이처럼 너무 따지거나 재지도 않고,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게 남아있음에도 그렇게 때문에 ‘잘 하면’ 행복해질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