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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누군가 박근혜가 되어서 지난 유신시절처럼 되면 어떡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건 마치 문재인이 되어서 빨갱이 세상이 되면 어떡하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럴 거라고, 내 생각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물론 백 퍼센트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문재인이 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까?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을만큼 무언가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마음 깊은 곳의 얘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나 자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낙관적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놈이나 저..
선거가 끝난 후 각종 말들이 많다. 새누리당의 압승이니, 민주당이나 야권연대의 패배라느니. 또 MB심판이 아니라 무능력한 민주당에 대한 심판이라느니. 물론 이런 말들이나 수사, 관형적인 표현들에 딴죽을 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가만 따져보면 사실, 승리라느니, 패배라느니, 심판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어떤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본질적 의미에서, 투표를 통해 여러 가치나, 신념, 또는 인물들 중에 하나를 뽑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승리나 패배와는 거리가 있는게 아닐까? 그것은 아주 단순한게 말해서,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아름다운 합의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을 아름답다 부르지 않을 재간은 없다. 그것은 분열에서 통일로 나아가는 거고, 그래서 투..
오래 전에 쓴 ‘떠나간 여자, RN-J, 낙서’라는 소설에서 나는 ‘떠나간 여자에 대해 누구도 공정하게 말할 수 없다.’고 썼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반대로 해야할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공정한 태도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떠나간 여자’일 거라고. 마치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는 위인은 항상 죽은 사람인 것처럼. 물론 문제의 핵심은, 떠나간 여자이든, 아니든, 아니, 그 누구에게도 우리는 완벽히 공정할 수 없다는 데 있지만, 이러한 결론은 너무나 손쉽고, 대개 아무 의미가 없다. 상황은 훨씬 미묘하고 복잡하다.며칠 전 술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소설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문제점은 내가 소설을 쓰면서 공정하기를..
누군가 곽노현 사태에 대해서, 만일 그가 보수였다면 어떻겠냐는 트윗을 올렸다. 그때도 우리는 그를 지지하겠느냐고? 요컨데 입장을 바꿔놓고 보라는 것인데, 이 말이 인문학을 공부한 소위 진보 지식인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마치 여성의 차별철폐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냐는 논리와 흡사한데,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입장이 완전히 동등해질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있어서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그 둘의 입장을 끊임없이 대조하고 때로 바꿔놓기도 하면서 정량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둘의 입장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데 있다. 만일 그렇게 입장이 쉽게 바뀔 수 있다면, 그건 '생각해 보자'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바꾸면 ..
좋은 노래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예술적인 것은 좀 다르다. 사람들은 예술이 마치 필요한 것, 지켜야할 것, 어딘가 안전한 곳에서, 마치 신이 있는 곳 같은 데에, 보존돼 있어야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예술도 신도 그런 곳에 있지 않다. 신과 무관하게 6일을 살고, 단 하루 신을 만나러 교회에 가는것처럼 우리는 예술을 만날수 없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 위안 조화 평안의 모습이 아니라, 때때로, 아니 대개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아름다움이 숭고가 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기계적인 부분과 닮았고, 또한 일견 조화롭게 보이는 세계의 한복판에 드러나있는..
사람들은 흔히 의처증에 걸린 남자가 믿지 못하는 건 아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의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믿을 만한가 믿을 만하지 않은가 라는 문제가 여기에 먼저 개입된다. 즉, 어떤 제3자가 있어서 그가 보기에 남편의 불신은 타당하다고 옹호할 수도 있다. 물론 또 여기에 제4자가 있어서 이번에는 아내 편을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의처증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즉 결국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다 해도 남편이 의처증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왜 그런가? 남편이 맞았는데, 그는 진실을 알고 있었는데, 왜 의처증일까? 그것은 정당한 의심이 아니었는가? 문제는 남편이 믿지 못하는 게 아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거꾸로 이번에는 아내가 외도를 하지 ..
그것외에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 자신과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쌍으로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대체될 수 있고 카운트 될 수 있다.생각해보자. 세상에 정말 유일한 게 있는가? 어떤 것으로도 결코 대체될수 없는 하나의 것. 그것은 그자신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것은 현상을 넘어선 어떤 것이 아니면 안된다. 나는 그러한 것을 단 두개만 생각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신과 나 자신이다. 이 두가지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자신이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신과 인간이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것, 이 역시 유일한 것이 아닌 그저 그런 보통의 사물이나 개념의 쌍에 지나지 ..
어렸을 때 학교에 갔다오면 점심으로 두 가지 메뉴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김치볶음밥과 라면이다. 이제 생각하면 보온밥솥이 아니라서 찬밥 밖에 낼게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랬다. 예전에는 스텐레스 밥그릇에 뜨거운 밥을 담아서 이불같은데 넣어두고는 했다. 그건 외할머니의 메뉴였다. 특별히 어느 쪽을 좋아하고 자주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치볶음밥은 정말 매웠다. 나중에 내가 스스로 밥을 챙겨먹을 때 즈음 그 김치볶음밥이란 걸 해봤다. 근데 아무리해도 그렇게 매운 맛을 낼 수가 없었다. 김치가 달라서? 아님,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뭐가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그건 고작 김치볶음밥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김치와 밥밖에 없었다.내가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 즈음에 '코코프라이드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