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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차로 여자를 데려다 줄 때마다, 여자의 집 근처에서 항상 걸리던 신호등이 있었다. 아니, 항상은 아니다. 간혹 가다 그 신호에 걸리지 않고 통과할 때마다 즐거워했던 기억도 있다. 그 신호는 큰길에서 우회전으로 꺾어진 뒤 짧은 터널을 통과해, 우리가 달리던 큰길과 나란히 놓여 있는 또 다른 큰길과 만나는 사거리 신호등이었다. 터널이 지면보다 낮게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차가 신호에 걸려 정지한 지점은 경사의 꼭대기였다. 차는 금방이라도 뒤로 미끄러질 것처럼 위태롭다. 신호는 길었다. 나는 핸드브레이크를 힘껏 잡아당겨 걸고, 클러치에서 발을 떼고, 여자 쪽을 바라본다. ‘다 왔어.’ 라고 말한다. 그때 여자가 나를 보며 지었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참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많은 것들을 기억..
예전부터 줄곧 생각해왔던 건데, 살아가면서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상대방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 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단순히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 말을 가로막거나, 또는 상대방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혼자 떠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직접적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그들은 굉장히 관용적이고 너그러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상대방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아주 사소한 말투와 눈빛, 그리고 태도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 의견 따위는 정말 하잘 것 없는 ..
가을이 되니, 사람들이 떠나나 보다. 아니, 틀렸다. 가을과, 사람들이 떠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고 보니, 북경의 나비가 날개를 퍼덕거리면, 미국에 태풍이 인다는 진술을 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난, 내가 모르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걸까? 사람을 마음에 두지 말자고 했지. 얼마나 많이, 떠나가는 것들에 대해, 사라지는 것들에 대비하자고 다짐했던가?
감기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해 전염된다. 겨울뿐만 아니라, 환절기는 물론, 한여름에도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추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나의 고민은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춥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는 것인가? 바이러스는 어떻게 된 걸까? 마치 따뜻한 온도가 세균을 왕성하게 번식시키듯이, 낮은 온도가 감기 바이러스를 발생시키는 것일까? 그럼, 한여름에 걸리는 감기는 뭐야? 추측. 감기 바이러스는 일반적으로 널리 세상에 퍼져 있다. 그러다 우리 몸이 추위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감기 바이러스가 침투해 들어온다. 맞나요? 감기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 또 한 가지. 감기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시중에 나와 있는 감기약이란, 신체에 침투해..
옥수역이 새롭게 바뀐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번에 얘기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위치를 옮기고 계단이 넓어지고 시설이 세련돼졌을 뿐, 옥외역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지붕이 생겨 비를 피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춥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옥수역내는 실내가 아니라 실외고, 금연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금연이다. 경희대를 다녀서 몇 안되는 좋았던 점중 하나는, 회기역이나 옥수역이 옥외역이어서 전철을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점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던 나로선 조금 실망스런 옥수역의 변신이었다. 그러다 오늘 굉장히 재밌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금연이라는 표지판(불이 붙어있는 담배 주위로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담배의 한 가운데를 자르듯이 사선이 그려져 있는 예의 흔한 표지판)..
빌리 조엘의 노래 중에 '업타운 걸'이라는 곡이 있다.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 이 곡을 자주 듣게 되었다. 아니, 최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반년이나 일년 동안이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 두 시간 이상씩 차를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다보니,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닐 테지만, 이 노래가 나온 지 오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굳이 화제로 삼지 않을 이유도 없다. 요컨대 최신유행곡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팝송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곡이나 가수들은, 말 그대로 누구나 알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등. 그런데 빌리 조엘에 대해선, 조금 양상이 다른 데, 나는 그의 이름을 재수 때 알게 되었다. 그렇다해도 그의 음악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이름과 곡명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상..
배달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얼음을 보았다. 얼음은 보도와 차도 사이의 배수로에 얇게 깔려 있었다. 얼음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실제로 겨울이 점점 더 따뜻해져서 얼음이 잘 얼지 않는지도 모르고, 그저 나이가 들면서 내 자신이 무심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서울의 배수시설이 좋아져서 인지도 모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하교길에 빙판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발걸음을 빨리 해 빙판 위를 미끄러지곤 했다. 균형을 잘못 잡으면 호되게 넘어지기도 했는데, 특별히 균형감각이 뛰어났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그런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왼발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한 손에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양팔을 옆으로 벌린 채 신나게 미끄럼을 탔다. 빙판이 길면 길수..
난 분명 너를 본걸까 많은 사람들 흔들리듯 사라져가고 그 어디선가 낯익은 노래 어느샌가 그 시절 그 곳으로 나 돌아가 널 기다리다가 문득 잠에서 깨면 우리 둘은 사랑했었고 오래전에 헤어져 널 이미 다른세상에 묻기로 했으니 그래 끝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쓸려 그저 뒤돌아 본 채로 떠 밀려왔지만 나의 기쁨이라면 그래도 위안이라면 그 시절은 아름다운 채로 늘 그대로라는것 얼마만에 여기 온걸까 지난 세월이 영화처럼 흘러지나고 그 어디선가 낯익은 향기 어느샌가 그시절 그곳으로 날 데려가 널 음미하다가 문득 잠에서 깨면 우리 둘은 남이 되었고 그 흔적조차 잃은 채로 하루하루 더디게 때우고 있으니 그래 끝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쓸려 그저 뒤돌아 본채로 떠 밀려 왔지만 나의 기쁨이라면 그래도 위안이라면 그 시절은 변함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