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얼음 본문
배달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얼음을 보았다. 얼음은 보도와 차도 사이의 배수로에 얇게 깔려 있었다. 얼음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실제로 겨울이 점점 더 따뜻해져서 얼음이 잘 얼지 않는지도 모르고, 그저 나이가 들면서 내 자신이 무심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서울의 배수시설이 좋아져서 인지도 모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하교길에 빙판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발걸음을 빨리 해 빙판 위를 미끄러지곤 했다. 균형을 잘못 잡으면 호되게 넘어지기도 했는데, 특별히 균형감각이 뛰어났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그런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왼발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한 손에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양팔을 옆으로 벌린 채 신나게 미끄럼을 탔다. 빙판이 길면 길수록 타는 맛이 났다. 영화 '러브레터'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린 여자아이가 멀리서부터 뛰어와 빙판길을 탄다. 빙판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여자아이는, 그 얼음 밑바닥에 날개를 편 채로 죽어있는 잠자리를 발견한다. 얼음은 내게 그러한 것을 연상시킨다. 밀봉된 채 고스란히, 형태를 잃지 않고 고요히 잠든 죽음. 차갑고 딱딱하지만,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투명한 기억. 그 위를 미끄럼 타는 아이들. 그 날카로운 웃음소리 등을 말이다.
동네에 커다란 스케이트장이 두 군데 있었다. 두 개의 스케이트 장은 서로 맞은편에 인접해 있었는데, 지금은 중학교가 들어선 쪽이 훨씬 크고 사람들로 붐볐다. 그 스케이트장의 이름은 '씽씽 스케이트'장이었고, 맞은 편은 '주환 스케이트장'이었다. '주환 스케이트'장은 이제 주차장이 되었다. 양 쪽 다 얼음이 얼지 않는 계절에는 밭이었다. 그러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흙 위에 비닐을 깔고 물을 채워 넣는다. 그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스케이트장을 찾았다. 눈이 오는 날에도 탔다. 눈이 오면 나이 든 형들이 너까래를 가지고 스케이트장의 바깥쪽으로 눈을 치웠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충격을 흡수해주는 안전막이 되었다. 스케이트장에서 하는 놀이 중에 단연 최고는 얼음땡이다. 얼음땡을 잘하려면 빨리 달리는 것만큼이나 빨리 멈추고, 방향전환을 하는 게 중요했다. 술래가 나를 향해 달려오면 나는 반대편으로 도망치다, 안전막에 닿을 때쯤 말 그대로 벽을 타듯이, 눈뭉치에 스케이트 날을 꽂으면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기억해보면 나는 곧잘 스케이트를 탔던 것 같다. 남자들은 스피드 스케이트를 탔고, 여자들은 날이 두껍고 뭉툭한 피켜 스케이트를 탔다. 가끔 같은 반 여자애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 중에 한 아이는 제법 스케이트 선수 같은 옷을 입고 빙글빙글 도는 재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은 우리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입장료를 받고 스케이트를 갈아신는 장소로 이용되던 비닐 하우스의 한 귀퉁이에서 팔던 '뽑기'나 '떡볶이'등도 기억난다. 그 바닥에는 짚을 꼬아 만든 가마니가 깔려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다. 대체 그런 가마니가 그 시절까지 남아 있었을까?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스케이트장의 주변부터 넘어가지 못하게 노끈이 쳐진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얼음이 깨져서 빠져 보았대자, 발목부근까지밖에 젖지 않는다. 스케이트장을 찾는 아이들도 줄어든다. 뽑기 장사나 떡볶이 장사도 철수한다. 안전막이 되어주던 하얗던 눈도 어느새 지저분해지고, 붉은 흙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날에 스케이트장에서 혼자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거의 없고, 눈이 쏟아지던 날 너까래를 밀며 눈을 치우던 나이든 형들만이 한가롭게 링크를 돌고 있다. 발밑에서 가끔씩 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며칠 뒤 스케이트장은 문을 닫고, 나는 스케이트날이 녹이 슬지 않도록 기름을 묻혀 깨끗이 닦고 창고 속에 집어넣는다.
나는 차 창문을 활짝 열었다. 라디오에서는 현재 기온이 영화 2도라고 했다. 얼음이 얼 정도의 추위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추운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얼음이 얼 정도의 추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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