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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업타운 걸 본문

단상

업타운 걸

물고기군 2001. 12. 27. 18:09

빌리 조엘의 노래 중에 '업타운 걸'이라는 곡이 있다.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 이 곡을 자주 듣게 되었다. 아니, 최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반년이나 일년 동안이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 두 시간 이상씩 차를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다보니,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닐 테지만, 이 노래가 나온 지 오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굳이 화제로 삼지 않을 이유도 없다. 요컨대 최신유행곡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팝송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곡이나 가수들은, 말 그대로 누구나 알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등. 그런데 빌리 조엘에 대해선, 조금 양상이 다른 데, 나는 그의 이름을 재수 때 알게 되었다. 그렇다해도 그의 음악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이름과 곡명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재수 시절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나로선 별로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상대방에서는 부담스럽게 친하게 구는, 친구 녀석 덕분이다. 그는 같은 반(나는 종합반에 다녔다)의 어느 여자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빌리 조엘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은 컴퓨터나 프린터가 널리 보급된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어느날 나에게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이라는 곡의 가사를 주면서 워드로 쳐서 예쁘게 프린트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피아노맨'과,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다른 곡도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분명 뭔가 사례를 하겠다고 해서,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제목을 굵은 이탤릭으로 해서, 당시로서는 꽤나 멋지게 만들어 주었다. 그 뒤의 세세한 상황(그가 그녀에게 그것을 어떻게 전해주었는가, 그녀의 반응 등등)은 당시에도 전해듣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는 그녀를 사귀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만, 그는 남자로서의 매력이 꽝이었다. 거의 모든 단점을 끌어안고 있는 녀석이다. 다리가 짧고, 뚱뚱하고, 머리가 크다. 얼굴도 영 아니다. 그다지 유머스럽지도 않고, 리더쉽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고독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리는 좋았다. 별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고, 음악도 많이 알았고, 잡다하지만 상식도 풍부했다. 짐작컨대 분명히 더 어렸을 당시, 국민학교나 중학교 시절에는 나름대로 반에서 인기있는 녀석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신과 타인의 신체에 눈을 떠가면서 그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 그때 그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좋아했던 여자는 눈이 상당히 예뻤다. 그가 몇번이나 그 점을 강조했으므로 나도 그 뒤로 유심히 그녀의 눈을 살펴보았는데, 과연 그랬다. 얼굴 자체는 눈에 확 띠는 미인이 아니었지만, 눈만은 확실히 예뻤고,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딱 한번 그녀와 직접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아마 대학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종로의 어느 극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지는 못했는데, 눈이 마주치고, 약 1, 2초간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데, 누구지?'라는 혼란의 시간이 있은 뒤, 그 1, 2초간 서로를 쳐다본 시간을 무마하기 위해 서로 아는 체를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몇마디를 나누고 금방 헤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빌리 조엘의 노래를 비로소 듣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들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나는 그게 빌리 조엘의 노래라는 것을 몰랐다.) 아, 빌리 조엘이라면 그때 그 친구녀석이 부탁했던 그 가수가 아닌가. '업타운 걸'이라는 노래는 흥겹다. 그 가사를 모르지만, 정말로 도심 한복판을 경쾌하게 걸어가는 어여쁜 소녀의 모습이 쉽게 연상된다. 왠지 그녀의 주위에는 밝은 햇살이 가득할 것 같다.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하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소년도 떠오른다.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는 사랑이지만, 그리고 분명 주위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그녀가 볼품 없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리 없지만, 뭐랄까,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드는 광경이다. 그 친구에게는 참 안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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