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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물고기군 2001. 12. 31. 00:36

옥수역이 새롭게 바뀐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번에 얘기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위치를 옮기고 계단이 넓어지고 시설이 세련돼졌을 뿐, 옥외역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지붕이 생겨 비를 피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춥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옥수역내는 실내가 아니라 실외고, 금연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금연이다. 경희대를 다녀서 몇 안되는 좋았던 점중 하나는, 회기역이나 옥수역이 옥외역이어서 전철을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점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던 나로선 조금 실망스런 옥수역의 변신이었다. 그러다 오늘 굉장히 재밌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금연이라는 표지판(불이 붙어있는 담배 주위로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담배의 한 가운데를 자르듯이 사선이 그려져 있는 예의 흔한 표지판) 바로 앞에 재떨이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일반 쓰레기통에 몰지각한 인간들이 함부로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를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쓰레기통 위에 '재떨이'라고 씌어있다. 나는 전철을 기다리는 내내 (옥수역에서 성북행 열차는 거진 이십분만에 한 대씩 온다.) 흥미롭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두 가지 경우를 추측해보았는데, 첫 번째 는, 순전한 실수인 경우다. 그래서 누군가 '왜 금연인데 재떨이가 있냐?'고 항의라도 하면, 그제야 부랴부랴 재떨이를 치우든, 금연 표지판을 떼든 하는 거다. 두 번째는, 일반적으로 금연인지 모르고 (옥외역이니까)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금연 표지판을 발견하고 '아, 여기는 금연이구나. 담배를 꺼야겠다.' 싶을 때를 위해서 친절하게 재떨이를 마련해 둔 거다. 이 경우, 금연 표지판 바로 앞에 재떨이가 있으므로 더 설득력이 있다. 한 가지 경우를 더 들자면, 금연이지만 사람들이 하도 그것을 무시하고 담배를 피워대니까, 어쩔 수 없이 재떨이를 마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해도 금연 표지판과 재떨이가 한자리에 있는 것은 좀 곤란하다. 일종의 모순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모순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그 두 가지가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동시존재 불가능성'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금연 표지찬 자체도, 재떨이 자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엄밀히 말하면, '동시공간 존재 불가능성'이다.

모순이라는 말자체도 그렇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자체는 괜찮다. '무엇이든 막아낼 수 있는 방패'도 좋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동시대에 동일한 공간에 존재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2001년에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이 있고, 2002년에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다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안된다는 말이다. 항상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존재'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동시공간성이 아닐까.

'개념'의 경우는 이와 양상이 다르다. 개념은 어쨌든, 시공간을 초월한 (또는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그런 점을 악의적으로 이용해서), 어떤 개념들은 모순을 숨기고 조작한다. 마치 모순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모순이란 것은, 어쨌든 시공간의 조건 속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념' 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 개념 속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득, 의욕적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아직 반의 반도 읽어내지 못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떠오른다. 확신할 수 없지만, 칸트가 붙잡고 있던 문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있지 않나 싶다. '의식의 외출' 같은 거 말이다.

다시 옥수역의 재떨이로 돌아와서.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일반적으로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이란 것을 사람들은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가령, '사랑하지만 헤어진다.' 어째서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지만, 또 거기에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 어떤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그럴 수 있어.'라고 별로 궁금해하지 않고 납득하는 것 같다. 또는 앞서의 나처럼, 재떨이와 금연 표지판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나름대로 (순전히 편의적으로), 모순을 모순이 아닌 것으로 개념적으로 바꿔낸다. 때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도저히 일상적인 현실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가끔 박찬호가 던지는 공 하나의 가치가 어떻게 500만원이 될 수 있을까, 몹시 궁금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이 시공간의 현실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일한 공간에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낼 수 있는 방패'가 한 자리에 있어도, 그 두 가지를 서로 맞부딪히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창을 사고, 어떤 사람들은 방패를 사서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걸 평화로운 공존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렇게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어쩌면,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란, 더 이상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모순은 현실의 가능조건이다. 만일 천국이라는 게 실제로 있다면, 분명 그곳의 시공간은 현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고, 달라야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 '모순'이라는 것이 언제나 말끔하게 제거하고 무찔러야할 괴물 같은 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모순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또 그건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

금연 표지판을 보고 담배를 꺼도 되고, 재떨이가 있으니 담배를 피워도 된다. 괜찮다. 옥수역은 어쨌든 옥외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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