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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Windows XP를 중심으로 돈다 본문

단상

세상은 Windows XP를 중심으로 돈다

물고기군 2001. 10. 23. 10:56

어제 우연히 미국계 보험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다,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이유로(게다가 미국계 보험회사다) 자연스럽게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의 세속적인 관심은 그 친구 보험회사의 손실액이 얼마쯤 되는지, 또 미국의 손실액이 얼마쯤 되는지 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다분히 보험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전문적인 의견이라 나로서는 그런가 보다 고개만 끄덕였는데, 결론적으로 미국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흥미로웠다. 거기에는 물론 일종의 음모론이 바닥에 깔려 있다. 정말로 테러를 가한 것이 빈 라덴일까? 자작극은 아닐까? 뭐 이런 얘기다. 미국 GDP의 십 몇 퍼센트가 군수산업이라니, 테러로 무너진 건물을 다시 올리는데 창출되는 일자리와 그에 따른 경기부양 등등. 과연 음모론의 충분한 주제가 될 만한 얘기다 싶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을 펼치자, 놀랍게도 그 음모론에 힘을 실어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푸틴 "ABM협정 손질 가능">.(중앙일보 10월23일자 10면) 국제면의 헤드라인이다. 그 바로 밑으로, <'반(反)테러선언' 짭짤한 성과>라는 제목도 보인다. 우울한 기사다.

테러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내가 가장 의아스러웠던 것은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의 반응이었다. 어떻게 단 한 나라도, 미국의 보복공격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까? 미국의 MD계획에 대해 패권주의를 경계하며 반대의사를 표시했던 나토의 많은 나라들이, 비록 뉴욕의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시하거나, 반테러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지만, 그것이 어째서 보복공격으로 곧바로 연결될 수 있는지. 훌륭한 식견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나 자신의 상식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세상 사람 모두가 그게 옳다고 하니, 아니 적어도 한 나라의 정부수뇌들이 한 사람의 반대 의견도 없이 옳다고 하니, 그들의 식견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고 볼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워도 나보다 더 많이 배웠고, 나이를 쳐먹어도 나보다 더 쳐먹었기 때문이다.

흥미있는 기사가 또 하나 있다.

<분수대>라는 짧은 칼럼인데, 제목은 '차이나 디스토피아'. 간략하게 소개하면, 지구촌 부자나라들의 인구비율은 16%인데, 여기에 중국 12억 인구가 가세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내용이다. 답은 디스토피아다. 그 '디스토피아 시나리오'는 이렇다.

"중국이 20년 뒤 한국의 1인당 에너지소비 수준에 이른다는 것은 지금 중동 석유수출 전량의 독식을 말한다. 자동차 수요의 폭발? 그건 무지막지하다. 현재 한국의 인구 4인당 1대 수준을 가정하면, 중국 땅에 3억대 이상의 자동차가 굴러간다. 현재 에너지 과소비대국 미국(차량 2억 4천만대)이 뒤로 밀리는 게 문제가 아니다. 중국발 이산화탄소는 지구를 덮게 된다. 지금 당장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의 14%가 중국산인데. 이것이 수십배가 뛴다고 가정해보라. … 중국더러 성정장을 멈추라고 할 수도 없고, 기술적 이노베이션에 기대는 것은 더없이 무책임하다."

그러나 내가 이 기사를 읽고 깨달은 것은, 20년 뒤의 중국산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그건 뭐라해도 20년 뒤의 일이고, 별 관심도 없다. 내가 깨달은 건, 16%의 부자들을 뺀 나머지 84%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아니, 그 16:84의 비율이다. 그 비율이 지켜지지 않으면 인류는 망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구나. 모두가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바득바득 16%에 편입되려고 애썼구나. 나머지 84에 대해 16이 자신의 누리는 것을 내놓지 않는 한, 84는 그대로 84여야만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인류는 끝장이다. 그런데, 누구나 알다시피 자본주의란 '사유재산'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세계가 아니던가? 사유재산이야말로 자본주의 세계의 신성이고, 불가침한 영역이 아니던가? 16에게 누가 디스토피아의 책임을 물을 것인가? 디스토피아는 20년 뒤가 아니라, 이미 지금, 84가 겪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아, 이런 간단하고 명백한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16면은 전면광고다. 그 광고의 헤드카피는 '세상은 Windows XP를 중심으로 돈다'. 이것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정도는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Windows XP가 개인사용자들을 상대로 온라인 인증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세상의 모든 컴퓨터는, 아마 십 년도 되지 않아 마이크로소프트의 서버에 목을 매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세상은 Windows XP를 중심으로 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건, 오늘 신문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해보니, 점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점이다. 세상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간다. 나는 매일 아침 신문을 통해 한 가지씩 세상에 대해 배우게 될수록, 한 가지씩 세상에 대한 이해를 잃게될 것만 같다. 내가 배웠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부정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배웠던 하나의 세상을 잃게될 것이다. 내게는 여전히 치명적이 사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언제나 처럼 나는 상관없는 일, 이라고 말해본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나 같은 인간은 그저 '이가희'의 방송스케쥴이나 챙기고, 팬클럽 정모날짜나 확인하는 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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