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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회색 후드 티 본문

단상

회색 후드 티

물고기군 2001. 10. 9. 15:33

"미안한데, 이 옷 좀 벗을게" 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여자는 실내가 더워서 겉옷을 벗는 것까지 나에게 물어보는 것일까? 여자는 모자가 달린 두꺼운 회색 후드 티를 벗었다. 안에는 가슴부근에 영문 로고가 쓰여있는 얇은 면 티를 입고 있었다. 무슨 색이었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내의 어느 한 술집에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새벽에 영업을 하는 술집이 대개 그러하듯이, 조명은 어둡고 자리는 좁다. 여자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그게 언제였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술집에, 그 시간에 우리가 자리를 마주하고 앉게 된 거지? 나는 기억의 선후관계를 하나하나 따져본다. 여러 가지 기억들이 혼동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벗었던 회색 후드 티를 통해, 결국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해냈다. 그러니까 그건 가을이었다. 여자는 그 날 회사 야유회를 따라 갔었다. "그런 데 따라가고 싶지 않지만, 빠질 수가 없어. 회사란 게 말이야." 하고 여자는 예의 그 나직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밤 열 한시쯤, 전화가 왔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왔다. 밤 공기는 싸늘했고,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빈차 표시등을 켠 택시들만이 텅 빈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고, 몇 대의 차가 나를 태우기 위해 속도를 줄였다가, 내가 외면하자 다시 출발했다. 얼마 뒤 여자가 신호등 건너편에 나타났다. 나는 신호가 바뀔 때까지, 그리고 신호가 바뀌어서 여자가 이 편으로 건너올 때까지, 줄곧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비가 오던 어느 날, 학교 정문에서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보았었다. 나는 여자의 걸음걸이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근처에 문을 연 술집이 없었다. 또한 그녀를 바래다줘야 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녀의 집 근처로 가는 게 나로서도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밤이 늦은 시각에 시내의 한 술집에 마주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 어느 정도 친해지면 다 여자와 자려고만 해." 하고 여자는 말했다.

나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가 어째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술은 그저 그랬다. 다시 또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여자는 준비한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어떤 종류의 말들은, 그 말을 꺼내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 대개 하지 못하고 만다. 어쩌면 준비한 말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또는,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여자는 사전에 몇 마디 질문을 던졌는데, 나의 대답이 예상과는 달랐는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 말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여자는 다시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달린 적이 있었어. 그게 굉장히 해보고 싶었거든."

"네 나이가 몇인데, 그런 짓을 하고 다녀." 하고 나는 농담을 던져본다. "재밌었어?"

"응. 좋았어."

"물론 남자가 모는 오토바이였겠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남자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여자가 나와 헤어지고 보낸 시간에 대해 묻는다는 게, 여자에게 어떻게 비칠지 몰랐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 오토바이, 그리고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여자의 손가락. 여자의 옆자리에 놓여있는 회색 후드 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그 정도일 뿐이다. 그것은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아마 우리는 한 병의 소주도 다 마시지 못한 채 술집에서 나왔을 것이다. 여자는 결국 준비한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말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는데, 아마 짐작과는 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설사 내 짐작 대로라 해도 나는 여자가 그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나는 분명히 이기적인 인간이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술집을 나와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하자, 여자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나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내가 택시를 타는 걸 여자가 지켜보았다. 한 손에는 회색 후드 티를 들고 있었다. 어째서 여자는 겉옷을 벗는 것까지 내게 물어봤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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