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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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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겨울 종로

물고기군 2001. 9. 21. 23:53

'모레 오전에 시간 있으세요? 정원 청소 좀 하려고 하는데...'하고 직원이 내게 물었다.
'목요일이요?'
'아니, 일요일이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저녁 시간에 종로에 잠깐 나갔다. 책을 몇 권 구하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벌써 겨울 군것질 거리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릿노릿한 계란 빵 같은 것 말이다. 금새 오방떡이니, 군밤이니, 고구마니 하는 것들도 잇따라 나올 것이다. 아, 추워라 하고 고개를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종종걸음을 칠, 겨울이 오늘 저녁 벌써 다가와 버린 기분이었다. 아직 반바지를 입은 젊은 사람 몇몇이 보였지만, 선택을 잘못했다는 걸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종로 거리는 겨울에 잘 어울린다. 여름 종로는 지저분한 느낌을 준다. 보신각에서부터 서울극장 까지, 혹은 그 반대편의 피가디리에서부터 허리우드 극장, 낙원상가, 인사동, 종로구청 골목, 무교동 낙지볶음 골목까지. 겨울이 깊어갈수록, 거리의 불빛들은 더욱 환해지고, 겨울 군것질 거리의 냄새는 진동하고, 때 이른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도 높아질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런 겨울의 종로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금보다 내가 훨씬 젊었을 시절의 일이다. 몇 번이고 골목의 코너를 돌아야 찾을 수 있는, 국물이 시원한 국수를 파는 포장마차집을 알고 있고, 따뜻한 생강차를 내주던 한적한 당구장도 알고 있다. 이면수와 막걸리로 유명한 와사등이라는 술집과, 허리우드 극장의 순대국집이라든지, 보신각 뒤편의 종로 빈대떡집도 알고 있다. 때로 혼자서 그 거리를 걷기도 하고, 팔짱을 낀 여자친구나, 아니면 중학교 시절부터 알던 오랜 친구와 낄낄거리며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카페를 나와서 담배를 물었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었는데도 역시 춥다. 스물 아홉 살의 겨울. 비겁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어디서 그 단어를 읽었던가? '구멍'이라는 소설에서였다. 찾아보면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알 수 있을 테지만, '가족에게 좀 더 비겁하면 안되겠냐고, 지도교수가 말했다.' 이렇게 쓰여 있었을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행복해질 때마다, 겨울 군것질 거리 냄새를 맡으며 옛추억에 빠지거나,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도, 행복해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정말로 비겁하지 않느냐, 하고 자꾸 내가 나에게 소리치고 있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막을 수가 없다. 눈이야 감을 수 있지만, 귀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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